브런치북 청음초 06화

청음초 6

by 능선오름

6.

몇 분 후 여자가 다시 방으로 돌아와 낡은 침대 위에 걸터앉거나 혹은 누웠을 것이다.

낡은 스프링이 거칠게 삐걱 대는 것 이 아마도 던지듯 몸을 뉘인 모양이다.

사내는 자신도 조심스럽게 매트에 몸을 뉘일까 하다가 방바닥에 깔린 매트에서는 아무래도 그녀의 소리 진원지보다 낮을 것 같아 쪼그리고 앉았다.

다행이라면 사내의 매트리스는 동네 재활용품 투기장에 버려진 스펀지 같은 매트리스라서 아무 소음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여자는 한동안을 훌쩍이다가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 듯했다.

벽 너머로 발신음이 한참 들리고,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응답이 사내의 귀에도 희미하게 몇 번 들려왔다.

열 차례가 넘게 전화 발신음이 들리고 그제야 상대가 전화를 받은 모양이다.

“나야……. 이제 전화도 안 받는 거니?” 낮게 가라앉은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

이미 사내 에겐 익숙한 그녀의 음성.

“그래 이제 정말 우리 헤어진 거니? 다신 안 보려고 하는 거야?”

그녀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정으로,

그러나 몹시도 노여움을 참고 있다는 듯한 느낌으로 통화를 이어 나갔고,

엿듣고 있는 사내는 마치 그녀가 자신에게 뭔가 말을 하는 듯한 느낌에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상태가 되고 있었다.


그녀의 통화는 상대방이 뭔가 긴 말을 하는 듯 침묵으로 이어지다,

‘응’ ‘그래’ ‘아니’라는 단답식의 대화로 다시 이어져 갔다.

“결국 너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 넌 내 몸뚱이만 탐냈을 뿐이었던 거지.

실컷……. 나를 가지고 놀다가 이젠 버린다는 그런 거지. 아니야? 어떻든 너는 나를 떠나간 거 맞잖아!”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뭔가를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린 것 은 거의 동시였다.

벽 건너에서는 거의 통곡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사내는 순간 참았던 긴 호흡을 내뱉었다.


사내는 우울해졌다.

그녀가 이토록 이른 시간에 있던 적이 없고 방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경우도 드물었으며

– 대부분 새벽에 들어왔으므로 –

더구나 그 상대방이 그녀의 애인이었고 막 헤어짐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사내에게는 씁쓸하고도 달콤한데 아쉬운 느낌이 되었다.

마치, 자신의 첫사랑을 친구 녀석이 손쉽게 애인으로 만들었다가 또 손쉽게 헤어짐을 반복하였던 것처럼.


알 수 없는 허탈감에 매트리스에서 일어나 사내는 거실로 나가서,

거실의 유일한 가구인 접이식 밥상 위에 통닭과 맥주를 풀어헤쳐 놓고 먹고 마시고 먹고 마셨다.

꾸역꾸역 울분과 알 수 없는 서러움과 또 다른 통쾌함과 억울함 같은 것 들을 양념 삼아서.

불쾌한 포만감으로 배를 채운 사내는 매트리스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좁은 창문으로 골목의 누런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어 불 꺼진 사내의 좁은 방에 희미한 그림자들을 드리우고 벽 건너에서는 이따금 흐느낌과 때대로 뒤척이는 침대 스프링 소리가 삐걱대며 들려왔다.

먼 곳 어디선가는 소방차인지 경찰차 인지 모를 사이렌이 또다시 들려오고,

그날따라 일찍 들어온 듯한 305호의 부부는 헐떡이며 이른 관계를 치르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왼편 귀로 들리는 훌쩍거림과,

오른편 귓가에 맴도는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들을 들으며,

단순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을 샅에 깊게 묻은 채 서서히 렘수면 상태로 접어들었다.


사내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사내는 실로 오랜만에 어떤 여인네와 질펀한 관계를 하고 있었다.

- 실제로 그랬던 기억은 없었다 -

여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303호의 여인 같기도 하였으며 혹은 305호의 아낙네 같기도 하였다.

여인은 사내의 배 위에서 사내의 전신을 끈적이는 혀를 이용하여 샅샅이 훑어 내리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사내는 자신이 목욕탕을 가 본 일이 매우 오래전이라는 사실에 몹시 미안하고도 당황스러웠다.

반쯤 당황한 상태 속에서도 멈추지 말았으면 하는 쾌감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낮은 신음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꿈속의 여인은 처진 가슴과 접힌 아랫배를 가진,

결코 젊어 보이지 않는 몸매였지만 희디흰 피부는 어둠 속에서도 마치 찰떡의 표피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워서,

사내는 그 가슴을 움켜쥐고 싶어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어떤 영문 인지 그녀의 젖가슴은 도무지 사내의 손아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사내가 모처럼의 질펀한 꿈을 깨게 된 것은 어디선가 들려온 알지 못할 소음 때문이었다.

keyword
이전 05화청음초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