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보았다
5.
그날 밤은 사내에게도 303호 여자 에게도 보기 드문 조금은 특이한 날이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지친 몸을 끌고 터벅터벅 3층 계단을 오르는 사내의 손 에는,
길거리 트럭에서 사 온 장작구이 – 물론 장작이 아닌 건축 폐목재이지만 -
통닭 한 마리와 맥주 세 캔이 검정 비닐봉지에 달랑 거리며 들려 있었다.
계단에서는 항상 그러하듯 원인모를 또는 원인을 알고도 남을 지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계단의 지린내는 일 년 전 사내가 이사 올 당시부터 시작해서 하루도 가실 날이 없어서,
혹시 계단 벽에 칠해진 색 바랜 누런 수성페인트를 처음 바를 때 물 대신 오줌을 섞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지독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해왔다.
사내가 가쁜 숨을 내뱉으며 녹슨 자신의 집 현관 앞에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광고 전단지를 줍느라 허리를 숙일 때 삐걱하며 303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당황한 사내가 곁눈으로 옆을 돌아보자 오랜만에 보는 옆집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부분 꺼지거나 깨진 복도등의 어스름에도 열린 그녀의 집 현관 사이로 희미하게 배어 나온 불빛에 그녀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수개월 전 보았던 모습 그대로 탈색된 머리를 오른편 어깨로 따 묶어 내리고,
몸에 달라붙는 요란한 노란색의 점프슈트 같은 옷을 입었는데 발에는 진초록색의 슬리퍼를 신은 맨발이었다. 하얗고 긴 발가락 끝에 드문드문 칠이 벗겨진 빨간색 페디큐어가 엉성하고,
입에는 절반쯤 지워진 빨간색 립스틱이 발려져 있었는데 그녀의 눈 주변은 검은색 마스카라가 얼룩얼룩한 것 이 마치 금방 울다가 나온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그 시간에 그녀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으므로 당황하면서,
이 순간 고개를 까딱 하며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른 척하고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전단지를 줍는 건지 놓은 건지도 모를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몇 초간 멈춰 있었고,
그녀는 흘깃 사내의 몰골을 일별 하곤 손에 든 검정 비닐봉지를 탁 소리를 내며 복도에 내려놓고 다시 쾅 소리를 내면서 문을 닫았다.
비닐봉지에서는 짜장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나왔다.
사내의 집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녹슨 베이지색 그녀의 집 철제 방화문 에는,
온갖 형형색색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는데,
어울리지 않게도 현관 손잡이 위에는 최신식 디지털 보조키가 진자주색으로 번쩍 거리며 붙어 있는 것이 흡사 그녀의 손발에 칠해진 선명한 매니큐어 같은 느낌이었다.
사내는 고개라도 까딱 거릴 것을 하필이면 어쭙잖게 수그린 모습을 그녀에게 보였다는 자괴감에,
갑자기 퇴근의 즐거움이 싹 가시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다시 닫았다.
딸깍.
303호에 그녀가 있다는 걸 알고 들어 온 이상 사내는 평소처럼 훌훌 벗고 샤워를 하기는 어려웠다.
자신이 씻는 소리 역시 그녀의 방에 생생하게 중계될 것 이 뻔한 상황이었으므로.
사내는 마치 종이옷을 벗어내듯 아주 조심스럽게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열어둔 채 얼굴과 몸을 씻기 시작했다.
어차피 수압이 한참 낮은 집이라서 시원한 샤워를 하지도 못하지만,
옆방을 신경 쓰며 씻으려니 비좁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야만 가능했다.
수도꼭지를 최대한 약하게 틀어서 모서리가 깨진 플라스틱 대야에 물을 받고,
조금씩 손에 묻혀 아주 은밀한 동작으로 얼굴과 목과 손과 발을 닦아 내었다.
아니 사실은 닦는 다기 보다 물을 발랐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후 방구석에 팽개쳐진 며칠은 곰삭았을 반바지와 셔츠를 주워 입고는,
통닭과 맥주도 잊은 채 방에 깔린 낡은 매트리스에 고요히 내려앉아 최대한 벽체에 밀착하여 옆방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가 좀 더 귀를 기울이니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이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자는 흑흑 흐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기도 하다가 코를 팽하고 푸는 소리,
티슈를 뽑아내는 소리, 맥주 캔 같은 것을 따는 소리 등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었다.
삼십 여분을 그런 소리를 내다가 삐걱하고 여자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이어서 쿵쿵 거리며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이 거실로 나간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출입구에 붙은 화장실 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지는 소리가 들리자,
사내는 재빨리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열어 둔 화장실로 들어가서 쭈그리고 앉아 귀를 기울였다.
화장실이라고 해봐야 간신히 성인이 몸을 돌려 앉을 크기이었으므로 애써 벽에 귀를 대지 않아도 충분한 청음초 거리다.
훌쩍이며 코를 푸는 소리가 다시 들리고 졸졸 거리며 소변을 보는 소리, 이어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다시 까치발을 들고 자신의 매트리스로 돌아와 벽 건너로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