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청음초 03화

청음초 3

그녀의 소리

by 능선오름

3.

303호의 여자에게 가지는 사내의 관심은 보편적인 수컷이 지니는 암컷에 대한 관심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사내가 자신의 영역을 드나드는 시간과 횟수들이 잦은 편도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얼굴이 익숙한 이웃이라곤 몇 안 될 뿐만 아니라,

그중 여성 이라곤 고작 두세 명인 데다 개중 짝이 없어 보이는 여성은 그녀가 유일 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사내가 빌라에 이사를 온 이후 수개월 간 그녀를 마주친 것 또한,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상황 이어서 기실 그녀에 대해 정확한 인상을 가진 것 또한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머릿속에 그릴 때 사내에게 떠오르는 이미지 들은 거의 대부분 그의 방 건너 공간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일상에서 생기는 소리 들이었다.


사내는 매일 아침 일터 인 물류센터로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거기서 하루 종일 박스와의 전쟁을 치르고,

녹초가 된 몸을 다시 통근버스에 싣고 돌아오면 매일 저녁 아홉 시가 넘는 시간.

라면이든 삼각 김밥 이든 편의점에서 사 온 간편식으로 저녁을 때운 사내는 열 시 반부터 꾸벅꾸벅 졸다가 선잠이 들어 버리고,

그러다 버릇처럼 새벽 한두 시에 눈을 뜨곤 했는데 그 시간 즈음에 303호의 여자는 어디서 들어오는지,

그게 퇴근인 건지 아니면 늦은 술자리인 것 인지는 모르지만,

집에 들어와서 달그락 거리며 뭔가를 먹고 그리고 씻고 새벽 서너 시가 되도록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잠이 드는 거였다.

그러면 사내 역시 설핏 선잠이 다시 들었다가 여섯 시 반쯤 휴대폰의 진동알람에 맞춰 일어나,

겨우 세수만 간신히 마친 상태로 간밤에 사 온 두유 정도를 마시곤 다시 직장으로 나가는 일상이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형상이었다.


때문에 그녀가 몇 시에 나가는지 낮에 무엇을 하는지 사내는 알 도리도 없었고,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진 않았었다.

사내가 303호의 여자에게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은 숱한 불면의 밤을 지새우다 나름 돈이 안 드는 유일한 오락으로 청음초 역할을 자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매일 새벽 들어와서는 타인들에 대한 조심스러움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무엇인가를 조리해서 먹고 또한 거침없이 샤워를 하였으며

– 이 샤워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사내의 볼품없던 성욕이 불현듯 고개를 쳐들곤 하였다 –

또한 거침없이 옷을 벗어던지는 소리, 얇은 속옷 따위를 입는 소리 들을 사내에게 제공하였다.

얼마나 집이 형편없는지 때때로 그녀가 샤워 후 로션을 바르는지 향수 같은 것을 뿌리는지는 모르지만,

사내의 군내 나는 화장실 환기통으로도 희미한 향기가 스며들곤 하였었다.

그러면 사내는 그녀의 벗었을 몸을 상상하며 침대에 번데기처럼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소리 한 자락이라도 놓칠 까 전전긍긍하며 그녀가 누웠을 것으로 상상되는 벽에 이따금 손을 슬며시 뻗어 더듬기까지 했던 것이다.

마치 벽 건너 그녀의 맨몸이 만져지기라도 하는 듯이.


그녀가 사내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없을지 따위는 사내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기회를 만들려고 하거나 그녀와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애쓰거나 할 만큼 사내의 정서가 여유롭지 않았거니와,

현재 거의 노숙자와 별반 차이 없어 보이는 모양새로 다니긴 하지만 사내에게도 나름 빛나던 하얀 와이셔츠의 나날들이 있었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라도,

아니 사실은 그랬던 멀지 않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라도,

행여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자에게 속내를 비추거나 혹은 그로 인해 거절을 당하거나 해서,

더 내려갈 것 도 없는 자존감을 땅바닥에 끌어내리게 되는 건 아닐지 두려웠기 때문에라도

사내는 그녀를 벽 한 칸 사이로 가까이 느낄 뿐 더 이상의 어떤 진전도 시도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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