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보다
2.
사내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근원지가 모호한 제각각의 소리들이 벽을 타고 혹은 천정에서 사내의 정수리 위로,
그도 아니면 거실 쪽 열어둔 화장실 환풍기 배관을 타고 스멀스멀 사내의 발꿈치를 향해 다가왔다.
그것은 때로 변기 물을 쏟아 내리는 소리이기도 했고,
수도를 틀었다 잠글 때 배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딸각거리는 불협화음도 있었으며,
누군가 방귀를 뀌는 소리, 드물게 야릇한 신음소리인 경우도 있었고,
어느 노인네가 발작적으로 뱉어내는 기침소리 일 수 도 있었다.
사내는 소리의 크기와 명료함, 머릿속에 그려지는 대강의 근원지를 두고서
' 이 변기 소리는 윗집이로군. 인상 사나운 윗집 아저씨가 늦게 들어온 모양이야.
아 지금 이 간드러진 신음소리는 두 간 건너 옆집 동거하는 젊은 연놈들 일거야.
아직 새파랗다 보니 시도 때도 없구먼. 이 새벽에 말이야.
403호 노인네가 해소기침이 심해졌나? 밤새 멈추지를 않네.
이 아기 울음소린 또 뭐지? 아 302호에 새로 젊은 부부가 이사를 온 거 같던데…….
그 집 아이 소린가. 애를 이렇게 새벽에 울리고 지랄이야. '
따위의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는 거였다.
기실 사내가 중점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집은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304호의 양 옆에 붙어 있는 두 집이었다.
물리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거리라 한밤에 크게 말을 안 해도 모든 소음들이 모조리 들리는 단점도 있었고,
집 오른편 305호는 이따금 폭발적인 다툼 소리로 그의 선잠을 소스라치게도 하지만,
역시 이따금은 생생한 부부생활을 생중계해 준 다는 이점이 있어서,
그런 날 이면 사내는 얼굴을 옆집과의 칸막이 인 거실 벽에 붙이다시피 하고
한참 동안 사타구니를 주물럭거리며 히죽대는 작고 은밀한 쾌감을 주기도 하였었기 때문이었다.
사내가 가장 관심을 두고 청음을 하는 집은 자신의 집 왼편에 있는 303호 이었었는데,
그곳에는 묘령의 노처녀가 혼자 살고 있음을 눈여겨봐 두었던 이유 일 것이다.
오래전 싸구려 집장사 들이 지은 빌라는 현관을 들어서서 왼편에 화장실과 침실이 있고,
오른편으로 거실 겸 주방이 붙어 있는 형태라서 그가 잠을 자는 방은 303호 안방과 붙어 있었다.
집장사들의 성의 없는 공사 행태로 인하여 303호와의 칸막이벽에 붙어 있는 전기 콘센트 구멍에서는
때때로 그녀의 잠꼬대 소리, 부스럭부스럭 옷 갈아입는 소리까지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이어서,
그럴 때마다 사내는 아주 은밀하고도 가책을 느끼는 심정으로 가슴을 콩닥 거리며 귀를 기울이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의무로 끌려갔었던 군대에서 경계 교육 때 대강 배운 청음초 훈련을,
최전방에 배치되어 지뢰지대 한가운데 매복 작전을 나가서 하곤 했었던 청음초의 초병 역할을,
이미 제대한 지 이십여 년도 지난 요즈음에 다시 하게 된 사내는 나름 흥미와 기대를 가지고 역할에 몰두하게 되었다.
303호의 여자는 사내가 일 년여 전 이 퇴락한 변두리 빌라에 월세를 얻어 들어오던 날,
낡고 먼지가 가득 덮인 절반쯤 너덜대는 방충망을 열어젖혀 놓고,
3층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사내의 남루한 이삿짐이 계단으로 삐걱대며 올라오는 모양새를
비스듬히 건네 보던 모습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가 마주친 낡은 빌라에 영역을 가진 원주민이었다.
여자는 탈색 약품에 타버린 듯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머리 한편으로 땋아 묶어 내린 채,
반쯤 지워진 듯 보이는 빨간 립스틱이 뭍은 입술에 반쯤 타다 남은 담배를 물고 있었고,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한 듯 창백한 낯빛으로 사내를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용모의 그녀는,
마치 이 낡은 빌라처럼 퇴락한 지방 소도시 어딘가의 문 닫은 주점 앞 의자에서 졸고 있는,
은퇴한 호스티스 같은 느낌으로 보였음에도 묘하게도 사내에게는 퇴폐적인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이미 중늙은이로 접어든 나이, 찌들고 드문드문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더벅머리,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언제 빨았는지 짐작도 어려운 낡은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내 에겐,
그래도 조금의 곁을 내어 줄지도 모른다는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되지 않는 가소로운 기대감 같은 것 이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