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는 소리
그가 소스라쳐 선잠을 깨어버린 것 은 캄캄한 새벽이었다.
마치 먹물이 가득 채워진 수조처럼 어둠이 농밀하게 채워진 곳이 어디인지,
순간적인 당황함 속에서 그는 누운 상태로 허공에 팔을 허우적거렸다.
잠시간 거칠어진 정신을 추스르고 보니 어둠 속 한구석에 작은 불빛이 보였고,
그게 시간을 표시하는 디지털 탁상시계의 불빛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새벽 두 시 이십사 분.
충분하다면 충분 하달 수 있고 아니라면 아닐 수 도 있는 두어 시간의 모호한 선잠.
아직 몽롱한 어떤 꿈같은 것 때문에 퍼뜩 깨어버린 사내는 두 손을 침대 매트에 짚고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 같은 것 이 들렸다.
아마 경찰차 이거나 구급차 소리 일게다.
높은 음역대의 사이렌 소리는 먼 곳 에서인 듯 작은 소리였음 에도,
그의 귓가를 화살처럼 찌르고 들어와서 몸에 덕지덕지 뭍은 선잠의 기운들을 불현듯 털어내기에 충분한,
각성 세포들을 일깨우고 말았다.
사내는 짙은 어둠 속을 마치 마약을 한바탕 투여한 중독자 같은 어눌한 몸짓으로,
매트리스 바깥으로 조심스레 한 발을 딛고 남은 한 발을 디뎌 어둠 한가운데 전신을 일으켰다.
얼추 선잠을 털어낸 그의 동공에 어둠 속 어슴프레 사각형으로 떠올라 보이는 문의 윤곽이 들어왔다.
더듬더듬 문의 윤곽을 더듬던 사내는 비밀금고라도 여는 듯,
일초에 반의반 바퀴 문손잡이를 돌려, 다시 일초에 반의반의 반 정도 넓이로 문을 열고,
희미한 빛에 절여진 거실로 흐느적대는 몸뚱이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수초의 시간을 들여서 조심스럽게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사내의 동작은 마치 시한폭탄이 설치된 금고문을 열고 닫는 듯,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웠고 호흡조차 멈추고 문을 여닫는 것처럼 경건하기까지 하였다.
차가운 거실 바닥 때문만은 아닌 듯 사내는 맨발 끝만을 디디며 발레 하듯 천천히 발소리를 지워가며 거실의 중심으로 향하였다.
그래 보아야 기껏 이삼 미터 남짓 한 거실의 중앙에 이른 사내는 무너지듯 낡은 소파 위에 몸뚱이를 주저앉혔다.
아직도 먼 곳 어디선가는 지침 없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거실 한편에 있는 좁은 창문으로는 이웃집의 검은 실루엣이 골목의 낡은 가로등 빛에 비쳐 기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사내는 누가 듣기라도 할 새라 낮은 소리로 하품을 하고 조심스럽게 어깨 위로 두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두 팔을 마치 폭탄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소파에 걸쳐진 앙상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집안에는 사내 혼자 뿐이란 걸 감안하면,
사내의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들은 우습기 조차 할 수 있겠으나 돈벌이에 혈안이 된 주택업자들이 마구잡이로 공사를 한 공동주택에 살고 있는 사내로서는,
한밤중에 윗집 옆집의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까지도 선명하게 들리는 빈약한 집 구조를 생각하여,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심스럽게 수습하는 버릇을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기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동주택에서 혼자 기거하는 중늙은이 사내가,
새벽에 일어나 덜커덕거린다는 뒷얘기 따위 듣고 싶지 않은 사내의 결벽 같은 버릇은,
도시로부터 떠밀려 이른바 수도권이라는 이름으로 퇴락한 이 동네에 들어와서 살면서 생겼다.
그것이 꿈 때문인지 아니면 매번 새벽을 울리는 사이렌 소리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사내의 선잠이 느닷없이, 하지만 규칙적으로 깨게 된 이후로 사내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긴 꼴이다.
그것은 이 낡은 공동주택이 가진 고질적인 단점을 활용하는 것으로서,
가만히 소파에 앉아 최대한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그가 머무르는 집 옆 어디선가 사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심야의 소리들은 얇디얇은 시멘트 블록 벽과 한 뼘 남짓한 바닥과 천장,
그리고 집과 집 사이들을 연결하고 있는 하수도관과 전선관들의 공명을 통하여 사내의 거실을 가득 채우곤 하였다.
그런 구조적인 결함들로 인하여 이따금 원인 모르게 잠이 깨어나고 나면,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거실 등 도 켜지 않음으로써 타인들이 자신의 깨어남을 알지도 못하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이웃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들을 온전하게 도청하는 악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따금 옆집 신혼부부의 사랑을 나누는
– 기실 사내는 그게 사랑을 나누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신혼부부라곤 하나, 그 남녀는 이따금 서로 죽일 듯 싸우고 유리창까지 깨부숴서 경찰이 달려온다거나 자주 여자 혼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날이 많았으므로-
소리가 들리거나 어느 집 가장이 늦게 들어와 좁은 욕실에서 몸을 씻는 소리,
심지어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소리들 까지도 생생하게 들려오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지각없는 누군가가 늦도록 텔레비전을 높은 소리로 시청하고 있다거나,
어느 미치광이가 음정도 안 맞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린다거나 하는,
그러다 결국 누군가 참지 못하고 어느 집 문을 두드려 다툼이 벌어지거나 하는,
온갖 소리들이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의 옅은 잠길 을 방해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해괴한 소음들에 지치고 노여워하기도 했던 사내는,
어느 순간부터 그 소음들을 도청 함으로써 소심한 복수를 하겠노라 다짐을 하게 되었었다.
언젠가 본 외국영화에서,
자기 소유의 아파트 건물 모든 세대에 도촬 카메라를 장치하고 엿보기를 즐기던 정신병적인 백만장자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이웃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생중계되고 있는 현실을 즐기게 되었다고 할까.
청음초 聽音哨 : 적의 움직임을 눈으로 볼 수 없는 흐린 날씨나 밤에 소리를 들어 적의 행동을 탐지하려고 전방에 둔 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