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복약 중입니다 1

불면증, 우울증 ing

by 능선오름

아직, 복약 중입니다 1

불면증, 우울증 ing


무엇이든 직접 겪기 전에는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런 면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내 판단력은 늘 편협하였다.

순전히 나 만의 관점으로 상대방의 고통스러운 현재를 바라보고,

그 모든 것은 정신력이 나약하다는 혼자만의 결론으로 혀를 차곤 하였다.

들어는 주되, 공감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굳이 변명거리를 찾아본다면 그것은 내 성장기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또 스스로 자처할 것이다.

내가 이것에 대하여 글로 남기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마도 나와 같이 어리석던 마음으로 과거, 현재, 혹은 미래에 고통을 겪을 사람들에게 엇비슷한 경험을 공유하여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리고자 함이다.

수면제는 고사하고 평소에 비타민 먹는 것조차도 싫어했었다.

약에 대해 특별히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으로 채워야 할 부분을 굳이 정제약으로 먹는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컸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몸으로 때운다는 방식은 나의 성장기와 무관하지 않게 후천적으로 생긴 일종의 습성이다.

그러나.

무려 이 년여를 넘게 정신과에서 처방된 약을 먹지 않으면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새운다.

그렇게 새웠으면 다음날 밤은 어지간하면 잠이 오기도 할 텐데, 안타깝게도 전날밤과 다르지 않은 밤을 보내게 된다.

약에 의지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어떻게든 안 먹고 버텨보려고 애쓴 게 벌써 오래전인데,

결국에는 무력하게 포기하는 내가 너무 싫어진다.

물론 잠을 못 자도 일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야 까짓 거 책을 읽고 졸음 오는 논문을 읽어가면서 밤을 지새우는 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당연히 잠을 못 이룬 다음날의 낮은 또 다른 지옥이다.

늘 몽롱하고, 운전대를 잡으면 당연히 위험하니 운전을 하기 어렵다.

상태가 그러하니 방금 한 말도 잊어먹게 되는 상태도 온다.

그런저런 구구절절한 이유들은 어쩌면 그저 약을 먹기 위한 이윳거리 일지도 모른다.

솔직히는 나도 내가 무엇을 과연 원하고, 어떻게 변하기를 원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한다.

처음에 정신과 의원이라는 데를 방문할 때는 정말 수십 차례 발길을 돌리고 돌리다 억지로 문턱을 넘어섰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의사에게 나의 현재 상태와, 스스로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를 고해성사하는 자리였다.

무늬만이긴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가톨릭 셰례를 받고 나서도,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그 또한 모종의 이유로 성당에 매주 미사를 갔을 때도,

세례를 받은 신자라면 당연히 치러야 할 고해성사조차도 외면했었던 나인데.

상태를 말하고, 밖에 나와 무슨 검사라는 것을 몇 장이나 작성하고,

그 검사 결과를 토대로 무슨무슨 증상이라고 의사가 말했을 때도 나는 그저 멍 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의사가 하는 말이 ‘정신과 의사 중에 이야기를 들어주는 의사가 있고, 증상을 보고 약처방을 하는 의사가 있는데 저는 후자입니다. 그 점 양해해 주시고, 만약 상담이 필요하다면 저희 원과 연결된 상담센터가 있으니 그쪽을 이용하시면 됩니다.’라는 말.

글쎄.

내가 최초에 불면과 불안이 극심하게 시작되었을 때 일찌감치 인터넷을 통하여 제법 인지도가 있다는 ‘심리 상담소’라는 곳을 가본 적이 있었다.

한 시간에 15만 원을 내는 상담을 하면서, 상담 이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여성 상담자는 아마 내 또래 혹은 그 아래 나잇대로 보였다.

의사도 아닌데 하얀 가운을 입고, 앉아있는 의자 뒤에는 무슨무슨 심리상담사 무슨무슨 심리치료사 자격증을 금테 두른 액자에 줄줄이 걸어놓았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민간자격증들이란 나 조차도 인터넷 강의에 비용을 내고 시간을 채우면 어물쩍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별로 신뢰는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사람이 다급하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다고, 누구라도 내 갑갑한 속사정을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니, 15만 원으로 한 시간가량 타인의 푸념을 들어주는 대가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내 말에 연신 고개를 주억대며 ‘그렇죠, 그랬겠어요, 저런’ 식의 추임새를 곁들이던 그녀의 시선은 내내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어쩌면 그녀는 그날 저녁 반찬거리를 쇼핑 중이었거나 아니면 단톡방의 수다를 즐기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당시 초 불안상태에 있던 내가 과장 된 망상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일단 몇 차례 ‘상담’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그득하던 내게 의사의 솔직한 답변은 차라리 나았다.

그렇게 처방받은 약은 1회에 5알 정도 되는 알약들.

정신과 처방약은 의원에서 직접 조제하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약봉지 겉에는 ‘정신과’라는 원래의 명칭이 안 들어간다는 것도.

그렇게 해서 그날 밤은 모처럼 빠르게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약물의 수렁으로 빠지게 되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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