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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게 Jun 05. 2023

묵직하게 읽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당신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세계문학_02




* 책의 내용과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




   천재라고 불리는 작가. 헤밍웨이를 절망에 빠뜨린 작가. 많은 심리학자들에게 아버지라 불리는 작가. 미하일의 아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그의 목소리는 늘 격정적이며 자신이 만들어낸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배우들의 말과 행동을 전달하기 바쁘다. 인물의 이동이나 가끔은 장면의 전환도 서술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실제로 눈앞에서 무대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굳이 말할 거리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보이니까. 보고 있으니까. 서술이 불필요한 것이다. 그런 작가로서의 괴짜적인 기질과, 그런 괴짜적인 기질이 가능하다는 데에서 우리는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이 창조하는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려놓고는 바라보며 글을 쓰다니 말이다.




   서술적 공백은 이야기에 속도감을 더하여 독자는 그 급류에 손쉽게 휩쓸린다. 그리고 한없이 떠내려가며 독자는 몇 개의 단어들만으로도 이토록 상징과 의미를 내밀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데에 놀라게 된다. 단순한 명칭이 반복되는 것만으로도 인물 간의 갈등은 더 명확해지고, 인물의 깊이는 한 층씩 더 깊어지는 것을 보면 당신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그처럼,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자신이 창조한, 그리고 창조할 배우를 무대 위에 올려놓고 진지하게 바라봄직하다. 바라보고 이해하고 날카로운 수술용 메쓰로 해부하여 드러내야 한다. 관객들 앞에 말이다. 무작정 맥락 속에 인물들이 아무렇게나 흘러가게 두는 것은 매력적이지 않다.




   이 책의 에필로그를 어떤 의미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서평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에필로그를 사족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경건한 거짓이라 하지만, 나는 에필로그야말로 이 책의 완성이라고 본다. 기어코 과거에 과거까지 들춰서 인물에게 선한 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보인 것은, 그 선한 감정이 소통되지 못한 수많은 좌절들 사이로 단 한 번 소통되어 얻은 활력이 얼마나 생생한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에필로그는 바로 그러한 명암에 대한 마침표이다. 따라서 이 책은 비극을 노래하다, 에필로그에서 희극으로의 과도기를 그려내고, 그 끝의 결말은 열어둔 구조라고 볼 수 있다.




   라스꼴리니꼬프,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쓰골리니꼬프(로쟈)는 사상에 의해 움직이는 지식인이다. 그가 믿는 사상은 역사적 사료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바탕으로 하며 사회 규범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가 원하는 인간상도 악하다. 그는 수천수만 명을 죽이고도 칭송받는 나폴레옹과 같은 특별한 악이 되고 싶어 한다. 사회 규범에 반하는 악행을 저질러도 영웅적인 사람이라 칭송받기를 원한다. 진정 그것이 이상을 위한 행동이라는 이유로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기를 원한다. 그에게는 나폴레옹이 그러하고, 요즘의 청년들에게는 타노스가 그러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그런 악이 될 수 없었다. 자기 본연의 도덕성이 그만큼 부족하거나 스스로에게 외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고른 희생양이 누구인지만 봐도 우리는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을 안다. 로쟈가 죽인 노파는 모든 면에서 그와 상극이다. 로쟈가 동생을 위하는가 하면 노파는 동생을 잔인하게 부려먹고, 로쟈가 극빈하다면 노파는 사채업으로 부유하고, 로쟈가 자기도 어쩔 수 없는 끈적한 도덕성을 가슴에 지니고 있다면 노파는 진정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 그는 실험의 피해자를 고르는 선택마저 한없이 도덕적이었던 것이다. 양심과 도덕을 완벽하게 배제하고 싶은 이가 한없이 도덕적인 기준에서 사회에 가장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같은’ 노파를 골라 죽인 것이다. 나폴레옹도 타노스도 사람을 고르고 골라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는 끝내 자수하여 감옥에 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도 여기에서 벌을 받는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끝없이 고통받는다. 이루지 못한 이상에 좌절하고 의문하고 반문하기를 반복하며 동생을 향한 죄책감에 스스로를 죽음에 내몰 만큼 괴로워한다. 그를 그토록 괴롭게 하는 것은, 끝내 잘라내지 못한 양심이다. 그 안에 죄와 벌이 모두 담겨 있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 자신은 그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점, 실패한 실험에 대한 대가를 동생과 나누게 되었다는 점이 그가 인식하는 자신의 죄이다. 그 실패와 대가에 괴로워하는 내면의 고통이 벌이다. 그에게 있어 판결은 죄가 아니며 형량도 벌이 아니다. 안에 들끓는 지옥이 있는 이에게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일까. 결국 죄와 벌은 다분히 사적인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스스로가 인식하고 고통받지 아니한다면, 법에 의한 판결과 형량이 무슨 소용일까.




   로쟈 말고도 죄와 벌의 사적인 차원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등장한다. 마르멜라도프는 수중에 들어오는 모든 돈을 술로 탕진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딸이 몸을 팔아 벌어온 돈까지 술로 탕진하고는 진심으로 자책하지만, 자신의 아내에게 두들겨 맞으며 사면되었다고 생각한다. 벌을 받아 다시 죄를 지을 힘을 얻는 것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자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스스로도 그것이 죄라고 인식하나 끝내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그녀의 총알이 비껴간 관자놀이에 스스로 총알을 박는다. 아마도 그가 쏜 총알 보다 그녀가 쏜 총알이 그에게는 벌일 것이다. 각자가 각자의 죄와 벌과 양심에 고착화된 세 사람. 과연 이러한 사람들도 갱생이 가능할까. 그들 스스로 죄를 짓지 않음을,  양심의 가책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선택하게 할 수 있을까. 법에 의한 처벌과 격리는 갱생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을, 우리는 로쟈의 모습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도스토에프스키는 하고자 하는 말과 해야 하는 말을 모두 분명하게 할 줄 아는 작가이기에 늘 해답을 제시한다. 후자가 상투적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로쟈가 편집적인 사상에의 집착을 잊는 장면이 딱 두 번 나온다. 하나는 마르멜라도프가 죽고 나서 자신의 전재산을 유가족에게 주고 돌아가는 길에, 달려온 그들의 포옹과 키스를 받고 활력을 느끼는 장면이다. 선한 마음을 주고받음에 그는 잠시 행복으로 충만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고받음'이다. 그에게 가족과 친구는 애정을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없기에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었고, 자신의 선한 행동을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타인들은 그를 왜곡된 사상으로 몰았다. 두 번째 장면은 에필로그에 가서야 나온다. 오랜 시간의 감옥 생활과 지병은 그의 사상을 누그러뜨리고, 그 틈을 동생인 소냐가 기어코 비집고 들어온다. 그는 끝내 동생의 헌신과 사랑에 굴복하고 그녀의 무릎을 안으며 활력을 얻고,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진다. 그렇게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군더더기 없이 선한 마음의 주고받음. 마르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에 그대로 몸을 내맡기는 것. 내맡기게 하는 것.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여주는 갱생의 싹이다. 이 이야기에서 소냐가 가지는 상징은 그런 것이다. 죄와 벌이 사적이라면 갱생은 교류를 전제한다. 장발장에게 꼬제뜨가 있듯이, 호크아이에게 블랙위도우가 있듯이, 로쟈에게 소냐가 있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혼자서 죄와 벌을 만들고 서로를 통해 뉘우치는 존재인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서로일 필요가 다분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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