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의 쓸모고 난 너의 쓸모야!
작년 말, 나는 남편이 직장에서 재계약을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휘말렸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주 4일제로 일하면서 원장님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고, 동물병원의 매출도 전보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길게 여행도 가고 여유 있게 지내고 싶어 연봉을 줄이고 근무일을 줄였는데, 막상 연차를 쓸 때는 이상하게 눈치가 보였다. 더 놀라운 것은 내 직장이 아닌데 내가 더 눈치를 보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나의 과한 우려와 달리 우리 집 4번 타자는 재계약을 했고 큰 금액은 아니지만 월급도 다소 인상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집 걱정인형인 나는 여전히 내 직장도 아닌 남편 직장의 매출을 걱정하고, 저러다 잘리는 것 아니냐며 혼자 오바를 떨곤 한다. 하지만 나는 보통 주 3일만 일하면서 남편에게 주 5일제를 주장할 수 없고, 내가 놀고 있는데 남편이 없으면 심심하고 외롭기 때문에 나 또한 그가 5일씩 일하는 것이 싫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합의한 지점이, 쉬는 날이 많으니 월 1회 정도 대진(단발성으로 근무를 대신하는 채용방식)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1인 원장체제의 동물병원 같은 경우 원장에게 개인적인 일이 생기거나 정규직을 구할 정도는 아니지만 간혹 일해줄 간이 인력이 필요할 때 대진수의사를 구하곤 한다. 365일 운영하는 24시간 대형동물병원에서도 갑작스러운 결원이 생겼을 때 대진 수의사를 구한다. 하지만 작년에 이어 전국적인 불황으로 구인 자체가 많지 않았고, 내가 토요일에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끼리 놀 시간도 충분치 않아 남편은 한 번도 대진을 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작년 말 내가 실업자 신세가 되면서 나는 밥먹듯이 남편에게 손바닥 봉투를 내밀기 시작했다. 남편의 어떤 말에도 근본 없이 "오빠, 돈 좀 주세요! 찡빠오는 돈이 없어요~"라고 치고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80%의 농담과 18%의 미래 계획, 2%의 진지함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남편 역시 지지 않고 짧은 팔의 어퍼컷으로 대응한다. 그래도 100번에 한 번쯤, 남편의 궁색한 용돈을 삥 뜯는 재미에 나는 신이 났다. 실제 생활비가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어떤 말에도 '궁금하면 500원'같은 일종의 반복되는 캐릭터 상황극 같은 것인데, 그런 나의 억지에 같이 장단을 맞춰주는 남편이 좋았다.
그런 이유가 은연중에 영향을 준 것인지 아님 아들 방학에서 도망가고 싶었는지 올해는 연초부터 남편이 적극적으로 대진 자리를 알아보고 이력서를 냈다. 이틀 야간 근무 자리에 큰 금액을 준다는 말에 나로서는 금세 설레는 마음이 되었다. 남편도 한 곳에서 벌써 만 7년을 일하고 있던지라 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내비쳤다. 하지만 저질 체력인 남편이 다만 이틀이지만 야간에 근무를 한다니 걱정도 되었다. 혹시라도 근무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졸려서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안 그래도 골골한데 괜히 병원비만 더 드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면접 보기 전날, 진짜 대진을 하려는 이유가 혹시 나 때문 인지 다시 물었다. 나 때문은 아니지만 내가 돈을 주면 너무 신나하니 날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했다. 천 원이든 만원이든 간혹 남편이 주는 과외 수입이 정말 신나는 것은 사실이라 부인할 수 없었다. 기대하지 않은 공돈은 월급보다 짜릿하다! 하지만 난 지금 수준에서 더 갖기보다 현재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진심이다. 그러니 절대, 나 때문에 뭔가를 더 할 필요는 없고, 정말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하라고 말했다.
딸랑 이틀 부수입에 너무 오바를 떨었던 걸까? 심지어 면접까지 갔지만 남편은 떨어지고 말았다! 설 다음날 시골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구겨진 얼굴을 보고 단박에 알았다. 다음 날까지 남편을 떨어뜨린 동물병원을 우리는 잘근잘근 물고 뜯고 씹었다. 불여줄 것도 아니면서 이틀 땜빵에 면접은 왜 하냐며 욕을 바가지로 했다. 다음에 대진 구한다고 면접 요구하면 쿨하게 거절하라고, 정 하자하면 화상면접을 제안 하라며 깔깔거렸다. 그러곤 덕분에 밤에 푹 자지 않겠냐며 "오히려 좋아!"를 외쳤다.
나 역시 작년 내내 공모전 광탈이라는 줄기찬 실패를 경험하며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이제야 조금 기지개를 켜고 있다. 머지않아 좁디좁은 상담업계의 구직시장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방탄조끼도 없이 맞아야 할 처지라 남편의 마음이 습자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거절당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초라하게 하고 부정적인 경험은 긍정적인 경험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덮여져 있을 땐 굳이 신경쓰지 않던 인정의 욕구가, 까이면 불쑥 고개를 든다. 그러니 같이 욕하고 웃으며 깃털처럼 가볍게 날려 버려야한다. 남편도 나도 이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금씩 경쟁력을 잃을 나이다. 그러니 실망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일들이다. 지금 경쟁력이 있고 일거리가 많다한들 몸이 감당하지도 못한다. 괜히 더 벌겠다고 야간근무를 했다가 진짜 사고라도 나면 큰 일이다. 더욱이 날 기쁘게 해주고 싶어 간다는데 안좋은 일이 생기면 그 부채감을 어찌한단말인가.
알바에 떨어졌지만 '럭키비키!'잖아! 목숨은 부지!
강풀 작가의 디즈니+ 시리즈 <무빙>에서 초능력을 사용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컴퓨터 앞에 앉은 컴맹 구룡포(류승룡 역)는 자신의 쓸모를 잃고 좌절한다. 그런 남편에게 아내 지희(곽선영 역)가 말한다.
넌 나의 쓸모야. 난 너의 쓸모고!
어디 감히 자본주의의 논리 따위가 우리의 쓸모를 가늠할쏘냐!
우리는 서로의 쓸모이고, 가장 비효율적인 효율이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가장 경쟁력 있는 관계 아니겠는가!
화요일의 감사
- 나 때문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구리까지 면접 보러 간 남편에게 감사.
- 같이 내리막길을 걸어갈 반려자가 있음에 감사.
- 혹독한 불황에도 직장에서 재계약에 성공한 우리집의 가장, 킹 오브 하우스 최고!
* 제목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817126642041328&mediaCodeNo=257&OutLnkCh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