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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멍, 불멍 그리고 커피멍

커피멍; 멍하니 쉼을 바라보는 시간

by 김봉춘 Feb 17. 2025

점심시간이었다. 오전 내내 이어진 회의와 업무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잠시라도 여유가 필요했다. 익숙한 프랜차이즈 커피숍 대신, 오늘은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회사 근처 골목 끝 작은 드립커피 전문점.


문을 열자 묵직한 커피 향이 나를 반겼다. 사장님 혼자 운영하는 이곳은 언제나 조용했다. 소란스러움도, 서두름도 없는 공간. 마치 세상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의 드립커피로 부탁드려요.”


사장님은 익숙한 동작으로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그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물이 끓고, 갈아진 커피 가루 위로 뜨거운 물줄기가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 그 단순한 광경이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나는 멍 때리는 걸 좋아한다.


타닥타닥 장작불 타는 소리를 들으며 불꽃의 움직임을 쫓는 불멍. 물이 흘러가는 걸 바라보며 반짝이는 물결의 움직임을 느끼는 물멍. 그 모든 순간들은 나를 바쁘고 복잡한 생각에서 끌어내 준다.


커피멍도 그랬다. 커피 가루 위로 물이 천천히 적셔지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과정을 바라보았다. 물이 흘러내리며 향이 피어나는 순간, 내 마음도 조용히 그 향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었다. 잔을 손에 들고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쌉쌀하면서도 고소한, 그리고 따뜻한 그 향이 피곤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한 모금을 입 안에 머물게 했을 때, 묵직한 고소함과 은은한 산미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마치 장작불의 온기처럼 마음을 데우고, 흐르는 물처럼 복잡한 생각들을 흘려보내는 기분이었다.


밖은 여전히 바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두르는 사람들, 자동차 소음, 거리를 메운 분주한 공기. 하지만 이곳에서는, 커피 한 잔 속에서, 시간을 천천히 마실 수 있었다.


직장인에게 커피는 단순히 에너지원이 아니다. 그것은 작은 쉼표다. 멍하니 커피를 바라보며, 불멍처럼 따뜻해지고, 물멍처럼 투명해지는 순간. 바쁜 하루 속에서도 나만의 리듬을 되찾는 시간이다.


잔이 비워질 즈음,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멍을 통해 찾은 이 느린 순간이, 남은 오후를 버티게 해 줄 것이다.


멍 때린다는 건, 내가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타닥타닥 불꽃처럼 따뜻하게, 졸졸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커피 한 잔처럼 잔잔하게. 그 순간들이 삶의 한가운데 작은 쉼을 선물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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