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문보다 더 투명한 장부, 제가 만들어보겠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OOO아파트!

by 주호재

오늘 드디어 아파트 동대표 선거일이다.

한 달 전, 박수도 소란도 없이 출마를 알렸다.

이후의 시간은 고요했고, 그 고요는 제법 무게가 있었다.


현수막도 없고, 유세도 없고, 악수할 손도 많지 않은 선거.

대신 나는 매일 엘리베이터 안에서,

쓰레기 분리수거장 앞에서,

민심을 엘리베이터 층수만큼 쌓아 올렸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숨결을 조금씩 익혀갔다.

생활의 리듬과 불편의 결을, 하루하루 몸에 들였다.

심지어

당근 거래를 하러 간 다른 동네의 아파트에서도

그곳의 사람들이 어떤 리듬으로 하루를 견디는지, 공기처럼 느껴보았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리듬과

불편의 결을 가만히 훑어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컨디션은 이상할 만큼 좋다.

몸은 가볍고, 머리는 또렷하다.

비장하다기보다는 차분하다.


어떤 경쟁자가 나올지는 아직도 모른다.

현수막도 없고, 소문도 없고, 비밀 조직도 없다.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흔들릴 이유도 없다.


오늘만큼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생활에서 길어 올린 확신이 나를 지탱한다.


나는 최강이다!라고 주문을 외워 본다.(ㅎㅎ)

최소한 이 아파트를 더 낫게 만들겠다는 마음에 있어서는.


캐치프레이즈는 단순하다.

“아파트의 가치는 올리고, 비용은 줄인다.”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이 문장을 고른 이유는

돌고 돌아, 아파트의 모든 문제는 이 두문장에 닿아 있었다.


불필요한 비용은 줄이고,

필요한 가치는 키운다.


관리비 고지서를 받을 때마다 드는

막연한 불신을, 하나씩 걷어내고 싶다.


그래서 내 공약은 생활 쪽으로 기운다.

1번 공약.

-반상회를 다시 '사람 사는 자리'로 만든다-

참석하면 5천 원치의 일반 쓰레기봉투를 드린다.

회의 안건과 시간은 미리 알린다.


안 오는 분들에겐 ‘벌금’ 대신

‘기부’라는 단어를 쓴다.

누적 두 번 불참 시 만 원의 아파트 발전 기부금.


벌금보단 기부가

사람 마음을 덜 삐딱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강요보다는

참여의 명분을 만들고 싶다.


2번 공약

-재정을 더 투명하게-

비용 사용 내역과 영수증은

경비실에 상시 비치한다.

누구든 슬리퍼 끌고 와서

들여다볼 수 있게.


혹시라도 비용을 해 먹으면! 아니, 공금을 부정하게 집행한다면

사용액의 100배를 물겠다는 각서도 쓸 생각이다.

다소 과하다 싶을 만큼의 약속이지만,

이 정도는 해야 신뢰라는 말이 겨우 시작된다고 믿는다.


투명함은 원래 좀 과해야 믿음이 생긴다.


아파트에서 가장 투명해야 하는 것은

출입문이 아니라 장부다.


오늘 나는 투표함 앞에 선다.

거창한 정치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가벼운 지원자도 아니다.

그냥 이곳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생활을 조금 덜 피곤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 하나를 들고.


누군가에겐 관리비가 덜 나오고

누군가에겐 회의가 조금 덜 피곤해질지도 모르는 자리다.


결과가 어떻든

오늘의 나는 꽤 진지하다.


괜히 비장했고

쓸데없이 진지했고

이상할 정도로 확신에 차 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