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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환철 Nov 21. 2024

좋은 문장의 힘

웃음이 절로 나는 춤추는 문장들

최근 독서모임에서 다룬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읽으며 잊고 있던 독서의 즐거움이 되살아났다. 그 여운으로 오늘도 책을 펼쳤다. 새벽에 눈이 떠져 유홍준 교수의 산문집을 읽다 보니 장문임에도 글이 바람결처럼 가볍고 흥겹다. 한 구절 소개해 본다.


이렇게 좋아하면서도 내가 담배를 끊은 이유는 담뱃값이 올라서도 아니고 건강이 나빠져서도 아니다. 세상이 담배 피우는 사람을 미개인 보듯 하고, 공공의 유해 사범으로 모는 것이 기분 나쁘고, 집에서도 밖에서도 길에서도 담배 피울 곳이 없어 쓰레기통 옆이나 독가스실 같은 흡연실에서 피우고 있자니 서럽고 처량하고 치사해서 끊은 것이다.
- 유홍준,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중 -




좋은 문장을 만날 때의 기쁨은 늘 내 안에 있었지만 어젯밤 내 글을 보고 달아준 페친의 진심 어린 댓글이 그 감각을 깨워주었다. 참 감사하다.

그래서 내가 너무 좋아해서 특별한 분에게만 소개하곤 하는 김애란 작가의 글을 꺼내 본다. 조용히 읽다 보면 배시시 웃음이 스며들고 함께 춤추는 기분이 든다. 여기부터는 읽는 속도를 늦추고 문장의 즐거움을 느껴보시라.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p.86~88

부사(副詞)와 인사

나는 부사를 쓴다. 한 문장 안에 하나만 쓸 때도 있고, 두 개 이상 넣을 때도 있다. 물론 전혀 쓰지 않기도 한다. 나는 부사를 쓰고, 부사를 쓰면서, ‘부사를 쓰지 말아야 할 텐데’하고 생각한다. 나는 부사를 지운다. 부사는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버려지는 단어다. 부사가 있으면 문장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고 말의 진실함과 긴장이 약해지는 것 같다. 실제로 훌륭한 문장가들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부사의 위험성을 경고해 왔다. 나는 부사가 늘 걸린다. 부사가 낭비된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그 문장을 고쳐 읽게 된다. 한 번은 문장 그대로, 또 한 번은 부사를 없애고, 그러곤 언제나 나중 것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문장에 부사가 있었다는 걸 부사가 없는 자리를 보며 기억한다. 부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모른다. 나는 ‘부사’하고 발음해 본다. 그 이름 어감 한 번 지루하다.

나는 부사가 걸린다. 나는 부사가 불편하다. 아무래도 나는 부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조그맣게 한다. 글 짓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부사를 ‘꽤’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매우’ 좋아하며, 절대, 제일, 가장, 과연, 진짜, 왠지, 퍽, 무척 좋아한다. 등단한 뒤로 이렇게 한 문장 안에 많은 부사를 마음껏 써보기는 처음이다. 기분이 ‘참’ 좋다.

물론 나도 안다. 부사는 단점이 많다는 걸. 나 역시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라는 문장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이 더 진짜에 가까운 마음이라곤 말할 수 없으리라. 우리는 늘 우리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지만 동시에 그것이 노련하게 전달되길 원한다. 그러니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이는 촌스럽거나 순진하거나 다급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리라. 실로 부사 안에는 ‘저것! 저것!’하고 무언가 가리키는 다급한 헛손가락질의 흔적이 담겨 있다. 부사는 그게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저것! 저것!’한다. 그것은 설명보다 충동에 가깝고 힘이 세지만 섬세하지 못하다. 부사는 동사처럼 활기차지도 명사처럼 명료하지도 않다. 그것은 실천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만날 큰소리만 치고 툭하면 집을 나가는 막내 삼촌과 닮았다. 부사는 과장한다. 부사는 무능하다. 부사는 명사나 동사처럼 제 이름에 받침이 없다. 그래서 가볍게 날아오르고, 허공에 큰 선을 그린 뒤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바로 그거’라고 시치미를 뗀다. 부사 안에는 뭐든 쉽게 설명해 버리는 안이함과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참’, ‘퍽’, ‘아주’ 최선을 다하지만 답답하고 어쩔 수 없는 느낌. 말言이 말言을 바라보는 느낌. 부사는 마음을 닮은 품사다.

‘제일’, ‘가장’과 같은 최상급을 쓰면 즐거울 때가 있다. 그때 나는 ‘무척’ 진실한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종종 다른 방법을 놔두고 단순하고 무능한 부사를 쓴다. 그의 무능에 머리를 기댄다. 부사는 점잖지가 않아서 금세 낯빛이 밝아진다. 조금 정직한 것도 같다. 부사는 싸움 잘하는 친구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는 중학생처럼 과장과 허풍, 거짓말 주위를 알찐거린다. 나는 거짓말을 쓰되 그것이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고심하다 겨우 부사 몇 개를 지운다. 누군가는 문장론에서 ‘부사는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썼다. 만일 지옥의 특징 중 하나가 ‘지루함’이라면 그것은 반만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부사는 세계를 우아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흥미롭고 맛깔나게 해 준다. 그러니 부사가 있을 곳은 지옥이 아니라 이 말도 안 되는 다급하고 복잡한 세상, 유려한 표현 대신 불쑥 부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속세, 그 세속에서 쓰이는 소설 안일 것이다. 부사를 변호했다. 기분이 ‘굉장히’ 좋다.

2006 김애란 작가 산문집

오늘 하루도 좋은 문장을 만나는 행운이 함께 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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