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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양 있는 아줌마 Nov 23. 2022

아이 친구 엄마와의 관계

첫째 땡땡이는 활발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유치원때부터 첫째땡땡이로 인해 다양한 아줌마를 만날 기회가 많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랬다.

핸드폰이 없던 저학년 시절, 첫째 땡땡이는 색종이 귀퉁이를 찢어 내 번호를 친구에게 전달했고,

똑같이 그 친구의 엄마 번호를 적어와서 나에게 전달했다.

그런 이후 주말에 그  친구와 놀고 싶다했고, 친구간에 서로 약속을 정했다고 하였다.

어찌저찌 친구엄마와 연락이 되어 둘은 주말에 함께 놀았고, 어떤 날은 한 엄마가 두아이를 보고,

어떤 날은 두 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예의차린 조심조심스러움 말투와 행동이었다가 만나는 횟수가 조금씩 늘자, 

대화가 늘자 나의 마음 속에는 볼멘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늘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 선지키기와 매너가 참 중요하다.

말은 말을 낳고, 평가를 낳고, 상상을 낳고, 조미료가 첨부된 뒷말을 낳는다.

그러니 늘 조심스럽다.

아이 친구 엄마와의 관계를 몇 번 겪어봤으니 이제는 보는 눈이 생기고, 

조심해야 할 부분이 뭔지 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사람에 따라 늘 새롭게 셋팅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내가 느낀 감정은 친구 엄마와의 관계는 산뜻할 수 없으며

'과연 깊이있는 진솔함이 필요할까'하는 의구심이다.

물론 아이친구 엄마들끼리 무리를 지어 의리, 의리를 외치며 서로 돕기도 하고,

만나서 정보공유를 하며 어떠한 사람들은 집안일까지 거들기도 하고,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혈육을 넘어서는 언니, 동생 사이도 나오기도 하지만

나는 어째 저 사람들이 진짜 서로 마음을 다해 통하는 사이일까 의문이 든다.

그랬건 아니건, 어떠한 관계로 시작이 되었던 결이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한번은 첫째 땡땡이 베프,짱친, 단짝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왔는데 께름칙함이 

남았었던 적이 있다.

친구 엄마가 우리 아이가 본인 집에 놀러갔을 때 한 말이라며 우리 아이의 표정과 말투를

흉내까지 곁들여 보여줬다.

좀 과한 표정과 말투가  마땅찮았지만, 나와 유쾌하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은 그 아줌마의 

노력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냥 가만히 있기에는 그 아줌마의 의도가 분명치 않아서 "우리 땡땡이가 그랬나요? 

우리 땡땡이는 자기 주장이 확실하죠?."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 땡땡이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말했으며 저 아줌마가 표현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크게 반응하거나 우리 아이를 낮추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기관 상담을 갔을 때도 선생님들이 늘 한결같이 이야기 하셨다.

우리 땡땡이는 자신의 의사표현을 정확히하고, 불편한 점이나 전달해야하는 점 등 이야기 할 때

분명하게 말을 잘한다고 했고, 나 또한 땡땡이에게 마음을 잘 이야기해야 상대방이 알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때 이후로도 몇 번의 대화에서 불편한 마음이 있었는데 정확히 내가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는 잘 몰랐다. 


어느날 땡땡이 친구 엄마와 카톡을 하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본인의 마음 속에 담아두기에는 어려웠던지 문맥에 맞지 않게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우리 땡땡이가 본인 아이에게 퉁명스럽게 말해서 본인 아이가 속상해서 화장실가서 울었다고 했다.

이 한마디를 듣고 내 감정의  형체가 고스란히, 선명히 새겨졌다.

땡땡이 친구 엄마는 자녀가 딸 한명이라 정말 곱게, 아이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친구처럼 키우시는 것

같았다. 보기 좋았다. 

나와의 대화 속에서도 땡땡이의 하루 일과를 다 꿰뚫고 있다는 자긍심을 여러번 내비쳤다.

거기서 나는 솔직히 마음의 방어벽을 세웠었다.

아이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컨트롤 하고 있다는 잘못된 신념에 휩싸인 엄마들을 만나봤기에 두려움이 

앞섰다.

워킹맘인 나는 일하는게 유세가 아니라 정말 일하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기본만 챙겨도 하루의 진이

다 빠진다.

아이와의 교감은 당연한 것이기에 우리 땡땡이에 관련된 일들을 쫑알쫑알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아이 친구 엄마를 만났을 때는 우리 땡땡이가 학교에 관련된 일은 잘 말하지 않는다고 에둘러서 말한다.

학교 폭력이나 아이의 행동이 크나큰 도덕적 윤리를 벗어났을 때는 당연히 어른들이 알아야 하지만,

사소한 일, 친구간의 자질구레한 이야기 등은  아이가 사회화 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기에 독립적인 

파트라고 생각하며 그 영역을 건드리고 싶지 않고, 어른으로서 끼어들고 싶지 않다.

당연히 땡땡이의 친구는 본인의 감정이 주가 되어 엄마와 교감한 것이고, 각색되어 있을 수 있으며

속상할 수도 있고, 화장실에서 울었다는 말도 '화장실'이라는 특정 장소와 연관된 이미지로 땡땡이

친구의 그 속상했던 마음이 배가되어 전달된 것도 사실이다. 


엄마들의 양육 가치관과 태도는 다 다르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는 확고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단 나는 "땡땡이 친구가 속상했겠어요;"라고만 대꾸했다.

땡땡이와 둘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정확치 않으며

우리 땡땡이는 당연히 내 자식이니 행실을 믿으며 그 아줌마의 일방적인 말에 내가 휘둘리기 싫었다.

이후에도 나는 이 일에 대해 우리 땡땡이를 캐물어 취조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자아이들의 감정싸움을 많이 보았고, 누구 한명의 잘못이 아니며 친구관계가 매일 얼마나 좋겠는가.

특히나 요즘은 한명 한명 집안에서 케어를 잘 받고 있는 아이들이라 표현력이 다들 좋다.

어쩌다 땡땡이가 짜증을 내길래 이때다 싶어 한마디는 했다.

"말을 예쁘게, 친절하게 해야 듣는 사람이 기분좋다. 엄마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럴꺼야."

땡땡이와 땡땡이 친구가 노는 모습을 보면 서로 싸웠다 다시 놀았다, 서운했네 어쩌네 감정적인 말도 하고

목소리도 높여지기도 하고 그렇다.

왜 본인 아이를 피해자로 만들고 본인 아이의 이야기만 듣고 상대방 아이의 잘못으로 프레임을 

씌우는지 의아스럽다.

오히려 본인 아이의 주체성과 뿌리의 튼튼함을 더 못믿는 것은 아닌가.


그 이후로도 몇 번 본인 아이가 속상해했다...라며 이야기를  하는데,

더 이상 들어주기 싫었다.

본인 아이는 티끌만큼의 감정의 불편함이 없어야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닿으면 부정탄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면 그러한 친구관계 속 경험은 다 불필요한 것일까.

아이들도 아이들끼리 놀면서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것들을 어른들이 다 평가하고, 제지하고, 규칙을 만들어 주어야할까.

물론 저학년 때의 일이니 애타는 모정이라고 넘어갈 수 있으나 나에게는 맞지 않았기에 좀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둘은 여전히 친했고, 자주 놀고 싶어했으며 편지도 주고 받았다.

그 이후로도 땡땡이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놀았는데 큰소리가 나서 마음이 바짝섰다가 그 이후에 둘이 

껄껄대며 웃길래 안도한 적도 있다. 


아이의 사회생활, 학교생활, 친구관계에 있어 어디까지 알은체를 해야하는지,

또 그 상황 속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아이의 자존감은 무너뜨리지 않고, 

올바로 지도할 수 있는지 늘 고민된다.

딱 한가지는 다른 아줌마가 일방적으로 우리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일의 경중을 떠나

엄마인 내가 아이를 믿지 못하고 휘둘린다거나 아이를 잡고 족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여자아이들은 감정히 세밀하여 다루기 어렵다.

언젠가 아이의 가방에 있는 조그만 쪽지를 보았는데 어떠한 친한친구가 쌀쌀맞게 대해서 울음이 나왔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몰라 속상하다.. 라며 본인의 고뇌를 적어놓은 것을 보고, 마음이 따가웠다.

아이가 상처를 크게 받지 않길 바라며 아닌척 다른 이야기에 빗대어 이럴 때의 행동요령에 대해서 말했는데

내 이야기를 귓등으로 안듣고, 어어~~ 하길래 말하는 것을 그냥 멈췄다...............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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