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일상 정보를 주고받는 단톡방에서 '중년'이라는 용어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충격이 말이 아니었다. 한 친구가 공유한 여행사진의 댓글에서였다. 중년에 붙은 '꽃'이라는 접두어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생애주기를 지나오면서 가끔 느끼는 자각인데, 나는 좀 늦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래 지인들과 친구들이 중년이라는 용어를 다 쓰는 동안에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되었으니.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이제 돌아보니 어느 날 갑자기 중년이 되는 건 아니었다. 서서히 무르익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인데, 실감하거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자각이 없으니 대책도 없었다는 것이다.
송홧가루가 날리는 5월부터 6월의 습기 사이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급성천식이었다. 해마다 몸을 사리며 조심조심 지나갔는데, 6년 전 처음 발병했을 때처럼 급성으로 찾아왔다.
호흡기내과에서 항생제를 처방받고 수액에 혈관주사를 맞고 네블라이저를 사용했다. 내 몸이 보내는 신호들에 집중하면서 두 달이 지나갔다.
숨을 쉬는 것이 힘들었다. 평생 잊고 살아갈 만큼 저절로 쉬어지던, 숨이 가빴다. 누우면 더 가쁘기 때문에 누울 수가 없었다.
종일 숨이 차면 얼굴이 발그레하다가 파래지길 반복한다. 그 사이 어느 순간엔 몽환에 빠져 무의식의 늪 어딘가를 헤매기도 한다. 그러다 내 가쁜 숨을 자각하고 정신을 차린다. 심호흡을 하고 네블라이저로 위기를 넘긴다. 잠시 편안하다.
호흡기질환은 우리 집안의 가족력이다. 아버지가 천식을 앓다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모시고 호흡기내과를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어머니도 기관지 질환을 평생 앓고 계신다. 유전자는 힘이 세다.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내려온 질환이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부모님을 원망한 적 없지만, 자녀에겐 미안해진다.
엄청난 습도 속에 피어나는 온갖 곰팡이와 균들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린 내 몸. 15일씩 두 번에 걸쳐 처방한 항생제로 체내에 유해균뿐만 아니라 유익균까지 사멸시킨 덕분에, 나는 현제 시급히 면역력을 만들어야 할 숙명에 봉착했다.
혈관질환을 가진 남편의 가족력을 관리하며 공부했던 관심을 이제 나에게 적용하여 확장할 필요를 느낀다. 천식은 인류가 고친 적이 없는 질환이라고 한다. 평생 동행할 친구로 여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질환과 관련하여 더 찬찬히 알아가면서 관리하겠다고 마음먹으니 한결 편해진다. 중년의 길목에서 세찬 장애물에 걷어 차인 것 같은 기분도 누그러진다.
누구나 지병이 있다. 막막했던 두 달간의 고통에도 이제 이름을 달아줄 수 있다. '나의 회색지대'를 이제 막 빠져나온 것이다. 언제든 끌려갈 수 있다는 공포감은 덤이고, 덕분에 나는 팽팽히 긴장한 상태다. 무심했던 시간들을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내 몸의 반응들에 즉시 대응할 것이다.
계절적으로 똑같은 시기에 발병한 급성천식으로 봄은 위기의 계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회색지대'를 공포스러운 컬러의 기억으로 방치할 수는 없다.
봄은 그렇게 맞이하고 지나가기엔 너무도 찬란하고 아름다운 생동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 생애의 모든 봄들이 품고 발아했던 빛나는 의미들을 회색지대에 묻히게 둘 수는 없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라이트그레이의 고급스러운 컬러감을 내면에 저장해두고 있다. 밝지만 가볍지 않고 분위기 있지만 탁하지 않은 컬러다. 나의 시 공간을 자유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컬러, 중년이 가진 독보적인 밀도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좋은 컬러가 또 있을까. 라이트그레이에 어울리는 빛깔들을 생각하니 미소가 떠오른다.
매일 아침 산책을 나간다. 몇 걸음은 힘들지만 일단 내딛기 시작하면 연속적인 능력을 부여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인체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걸음은 이어진다.
아침의 공기를 마시면 행복하다. 일상을 회복하는 것만큼 감사한 일이 또 있으랴마는 잊는 것이 인간이다. 잊었기에 기억할 일이 생긴다. 그래서 더욱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