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아침이다. 창문을 열자 청량한 공기와 함께 새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들면 먼 산이 연한 녹색계열의 털실로 떠놓은 러그처럼 밤새 더 폭신해져 있다. 벚꽃을 맞이하며 봄 타령을 했는데, 4월 마지막 주가 되니 사방이 꽃 천지다.
클래식 연주곡을 좋아하는 나는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을 들을 때마다 작곡가의 천재적 표현력에 전율한다. 봄은 변화무쌍하다. 일교차도 심하고 일기 변화도 예측불허다. 계절과 환경에 민감한 내 기분도 생동하는 봄기운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마음 속 음표들이 연주하는 교향곡에 귀를 기울이기 좋은 계절인 것이다. 곡우에 맞춰 봄비가 지나가면 겨우내 비어있던 산과 들은 물론이고 회갈색 도시의 우중충한 틈새까지 신록으로 들어찬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엔 어떤 차를 마실까? 순전히 주관적인 선택이지만 나는 봄이 되면 약발효차인 백차가 생각난다. 녹차와 비슷한데 조금 더 단맛이 나는 백차는 10%정도만 발효하여 만든 차다. 한국에서 백차는 소량 생산되기 때문에 마실 기회가 흔치 않다. 하지만 그 여리고 섬세한 맑은 맛이 봄의 새싹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한 번 마시면 잊을 수 없다.
바이차라고 불리는 백차는 중국 복건성에서 생산되는데, 수미 백호은침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흰솜털이 덮인 어린 차의 싹을 덖거나 비비지 않고 약간 시들린 채로 건조시켜 만든다. 마른 상태의 차는 솜털 때문에 은색의 광택을 띄며 우렸을 때 수색 역시 무색에 가깝다. 향기가 맑고 맛이 산뜻하며 목 넘김이 가볍다.
안길 백차는 저장성 안길 현에서 생산되는 특산 차다. 저온에 민감한 차나무가 23도 이하에서 엽록소의 합성을 방해받아 백화현상을 일으키는데, 아미노산 함량이 높아진 4월경에 채엽해서 살청을 거치지 않고 건조시킨다. 쓴맛이 거의 없고 감칠맛과 단맛이 매우 좋으며 상큼한 레몬 류의 허브향이 있다. 백차의 알려진 효능으로는 신경세포를 보호해 뇌의 손상을 예방하며 긴장해소와 진정효과가 있다. 고혈압 환자의 혈압 저하와 기억력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 치매와 뇌졸중 등의 노인성 질환에 효과가 좋다고 알려진 백차는 중국의 지도자들도 애용했다고 한다.
고급품은 잎보다 차의 싹이 길며 통통한 찻잎이 유백색의 솜털로 덮여있어 우렸을 때 찻잎이 펴진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수색은 연하다. 백차는 우리는 온도가 중요하다. 감칠맛이 나는 아미노산은 60°C 에서 가장 잘 우러나기 때문에 백차의 고유한 맛과 영양성분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물의 온도를 알맞게 지키는 것이 좋다. 쓴 맛이 나는 폴리페놀이나 카페인은 80°C에서 잘 우러난다.
백차에 모리화를 블랜딩한 재스민 차에 손이 가는 것도 완연한 봄날의 즐거움 중 하나다. 재스민 차는 완연한 봄날 사방에서 피어나는 봄꽃의 향기처럼 그윽하여 쳐진 기분을 화창하게 밝혀준다. 차를 우렸을 때의 수색 또한 투명한 연둣빛이다. 물속에서 꽃다발이 두둥실 피어나는 꽃덩이 차도 백차에 블랜딩하여 만든다. 백차가 화차의 향기와 맛을 잘 드러내주고 차의 기운을 향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백차와 블랜딩한 꽃덩이차는 그 장식적 효과를 이용할 수 있어서 여럿이 어울리는 파티와 같은 즐거운 자리에 어울린다. 유리다관에 띄워놓고 마시면 눈과 입이 즐겁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재스민 차는 중국의 식당에서 물대신 내주어 식사와 함께 즐겨 마신다. 알려진 효능으로는 혈중 콜레스테롤을 배출하여 혈관 질환을 예방하며 아로마 효과로 스트레스를 이완시키고 피부미용과 다이어트에도 좋다. 하지만 재스민의 오일성분이 임산부에겐 좋지 않으니 임신 중에는 주의해야 한다. 또 카페인에 민감한 사람도 수면에 방해를 받을 수 있으니 주의해서 섭취해야 한다.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기호식품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기호식품 하나쯤 가지고 살아간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독특한 향기나 맛이 있어 즐기고 좋아하는 식품“을 기호식품으로 정의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호식품으로 술, 담배, 차, 커피 등을 꼽는다. 기호식품이 필요한 이유는 바쁜 현대인이 각박한 하루를 감당하기 위해 잠시잠깐이나마 자신에게 휴식을 주고 정신을 충전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사회구성원들은 다양한 기호식품을 애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술도 다양하고, 담배도 종류가 다양하며 차와 커피도 그 종류가 다 알기 어려울 만큼 다양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연령이 낮은 세대일수록 기호식품보다는 기호품을 통해 짧은 시간이나마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호품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장난감, 보석, 골동품 따위와 같이 사람들이 취미로 즐기거나 좋아하는 물품”이다. “취미로 즐기거나 좋아하는 물품” 이라는 범위는 어디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잠깐 보는 웹툰이나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의 릴스 같은 것도 포함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오래전 정의된 사전적 정의들이 업데이트 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들은 기성세대의 전유물로 취급되고, 새로운 문화적 현상은 신조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호식품은 분명 일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발전해왔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며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확장시키기 위해서도 애용된다. 또 기호식품도 하나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하게 선택하여 이용하고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인이 하루에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 많고, 상황도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점이나 카페가 이토록 넘쳐나는 이유도 현대인의 다양화된 삶을 반영한 현상으로 보인다. 무엇을 선택하든 자유지만, 기왕이면 좋은 기호식품을 선택하는 것이 짧은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아가는 기술이다.
기호식품은 개인의 의식과 건강에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친다. 술의 알코올이나 담배의 타르와 니코틴, 커피와 차의 카페인은 모두 중독성이 있다. 알코올의 경우 중독과 폭주 습관으로 이어지면 의존성 질환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고, 강한 중독성으로 인해 뇌의 변형과 각종 장기를 파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또 담배의 독성 물질들은 폐와 장기들의 심각한 파괴를 일으키며 역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술과 담배의 포장지에 그 위험성을 알리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도 치명적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기호식품이 가벼운 기호식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만 하는 중차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페인의 경우 직접적인 유해성보다는 간접적 영향력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차의 카페인은 녹차의 주효성분이 체내에 흡수되도록 도와 정신을 각성시키고 역할이 끝나면 체외로 배출되므로 누적되거나 중독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차는 옛날부터 약으로 이용되어왔고, 중요한 결정을 하거나 국가적 의례를 진행할 때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차는 구하기 어려워 귀하게 취급되어왔다. 국가의 제례나 가정의 제례 역시 차가 중심이었다. 명절날 자손들이 모여 조상에게 올리는 간단한 차례 상의 중심도 차였다. 현대로 오면서 차례는 사라지고 조상의 기일에 술과 음식을 올리며 추모하던 제사의 형태로 고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국학진흥원의 차례 상에 대한 고찰과 안내는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한국 역사 속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화랑이 훈련을 할 때 정신수양을 돕는 의식으로 다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랑이 먼 곳으로 훈련을 떠날 때 차 도구를 나르고 음차를 돕는 다군사라는 직종을 가진 도우미가 선발대로 나설 정도로 차를 활용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차와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연구되고 저술되어 밝혀지고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시대의 차 문화를 선도한 초의선사와 함께 우리가 잘 아는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등의 선학들이 차를 통해 교류하고 저술활동을 위해 차를 애용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차 사랑과 차에 얽힌 기록들을 들여다보면 웃음 지을만한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다.
차를 고르는 것은 일상다반사 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일이다. 함께 마시는 차도 좋지만, 때로 혼자 마시는 차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나를 위한 조율과 힐링이 차를 고르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차를 고르는 순간부터 오감은 기대와 반응으로 섬세해진다. 그저 차에 알맞은 다구를 준비하고 물을 끓여 찻잎을 우려 마시는 일련의 과정에 집중하다보면 분산되어 있던 정신과 눌리고 치이고 방어하느라 지친 마음이 회복된다. 나를 어루만지고 점검할 수 있는 기회이며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다독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기호품을 소비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꼭 차를 권하고 싶다.
차를 한 모금 물고 그 향기와 수색과 맛을 음미해보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구겨진 줄도 몰랐던 자아가 깊은 호흡을 회복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선 외부의 기준에 휘둘려왔던 자신의 삶에 대해 객관적 시선으로 조명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에 내가 살아내고 있는 삶을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해석하며 나아갈 방향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의 소중한 시간을 감사하게 누리고, 남은 날들을 사랑으로 살아낼 소망도 견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