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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가객 Dec 19. 2023

뇌를 깨우는 시간  - 황홀한 에스프레소

일상힐링 레시피

        

 신선한 바람 속에 실려 오는 에스프레소 향기를 따라 카페에 들어설 때의 기분을 기억한다. 발걸음이 향하니 생각이 끌려간 것인지 커피 향이 보행을 견인한 것인지, 정신을 차려보면 카운터 앞에서 메뉴판을 보면서 즐거운 고민에 빠져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침시간엔 따스한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중에서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망설이고, 햇살이 맑은 오후라면 디카페인 음료 중 전통 차나 허브향기의 기억들이 뇌를 두드리는 곤혹에 빠진다. 드문 일이지만 구름이 낮게 내려온 오후에 덧에 걸린 듯 카페라테와 카푸치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밤잠을 저당 잡히기도 한다.     

 

 폐로 흡입된 커피 향과 식빵 냄새가 거부할 수 없는 악마의 유혹처럼 느껴질 땐 지체하지 않고 굴복한다. 당장 충전이 필요하다고 몸이 나에게 신호를 보낼 때 마시는 커피야말로 비교 등급이 없을 만큼 맛있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던 사람은 커피를 마시기 전까지는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느낌에 종속된다. 커피가 아닌 다른 어떤걸로도 충족이 안되는 중독상태, 그것이 강렬한 각성작용의 무시무시한 영향력이다  


 커피는 담배나 알코올 등 다른 기호식품들에 비해선 꽤 유익한 영양분이 많다. 향이 좋고 우유나 설탕과 배합하여 여러 음료로 활용할 수 있어서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커피는 심부전 위험을 낮추는 등 건강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커피 섭취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찮다. '카페인' 성분이 인간의 교감신경을 항진시켜서 이상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 두통, 불면, 짜증, 긴장, 잦은 배뇨 또는 배뇨조절 불가능, 빠른 심장박동, 근육떨림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런 경우 커피를 중단하는 것이 좋다.


 오랜 시간 이용되면서 배타적 이론과 평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커피는 세계 3대 음료의 하나가 되었다.      


 서양에서 커피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에스프레소 머신의 개발과 함께였다.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차와 달리 커피는 개방적인 문화코드로 받아들여졌다.  누구든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카페에 들어가면 1페니로 커피를 마시면서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 커피를 팔던 영국의 초기 카페가 1페니 학교라고 불렸다는 것은 새로운 기호식품인 커피를 향유하는 이들에게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제공하는 동시에 교양에의 갈망까지 충족시켜주었다. 그러한 매개물로서 인정을 받으면서 커피는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다양한 기호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독특한 쓴맛에 어울리는 다양한 첨가물이 시도되었다. 산지별 향기와 맛의 차이가 상이하기 때문에 커피의 종류들을 감별하고 보다 좋은 맛을 소비자에게 공급하기 위한 커핑으로  발전해갈 수 있었다.


   




 매일 오전에 나 혼자 마시던 커피는 두 아이가 성인기에 들어서면서 함께 나누는 음료가 되었다. 해외에서 일정한 기간을 보내고 합류한 자녀들의 기호를 존중하여 향기롭고 즐거운 드립커피를 만들어주었다.      


 얕은 구름이 해를 슬쩍 덮고 있는 하늘을 확인한 날에는 잔잔한 재즈피아노 연주곡을 골라 적당한 음량으로 켜놓았다. 음악을 선곡할 때마다 계절은 물론이고 날씨와 시간을 고려하게 된다. 미묘한 감성과 기분을 반영하여 골라낸 연주곡이 공간에 울려 퍼질 때, 평면이던 공간이 음파의 입자들로 숲이 되어가는 느낌을 사랑한다.     


“오늘은 오늘의 에스프레소가 있다.”     


 아침엔 에스프레소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어떤 특별한 날엔 에스프레소를 마시기 위해 아침을 맞이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진정한 아침이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시간에서 시작되는 그런 날이다. 미각과 함께 생각이 깨어나는 시간, 강렬한 향으로 뇌를 깨우는 시간이다.     


 완벽한 브루잉을 위한 홈 카페 도구는 간단하다. 순간 바리스타 실습을 위해 찾아간 커피연구소의 에스프레소 머신이 생각난다. 지나간 시간은 얼마만큼은 그리운 빛깔로 떠오르는 것인지, 그 때의 기억이 정겹다.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과 위로를 공유하기 위해 핸드 드립을 배우고, 커피감별사 과정에 관심이 생겨 몇 달 동안 이론을 공부했다. 그러다 바리스타과정을 이수하게 되었다. 녹차만큼이나 커피도 재미있는 역사와 발전과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커피나무가 자라는 토양과 기후도 차와 조건이 많은 부분 겹쳤다.      


 바리스타 실습과정을 위해 이천 백사면에 소재한 아시아커피협회에 가기 전, 나는 이미 30년 동안 나만의 홈 카페에서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무렵 원두커피메이커가 유행했고, 그 때 마련한 분쇄기와 메이커로 매일 아침 커피를 내려 이웃 지인들과 함께 마셨다.      


 실습을 다니던 무렵, 아무 때나 들러서 라테아트를 하라고, 연구소장님이 키를 내주셨다. 커피연구소에 들어서면 통 창의 버디 컬을 열고, 맞은 편 양자봉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으로 환기를 시켰다.     

 

 마치 엊그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손끝에 만져질 것 같은 체험 덕분이다.


 전날 분리해 친환경 세제에 담가놨던 포터필터를 헹궈 제자리에 장착하고 뜨거운 물을 몇 초간 흘려보낸다. 스팀 노즐을 장착하고 스팀기능을 작동해 상태를 체크한다. 치익, 증기음과 함께 스팀이 분사된다. 마지막으로 온수 온도와 연수기의 상태를 확인하고 점검을 끝낸다.      


 그라인더의 분쇄도를 확인하면서 첫 번째 커피 향을 맡는다. 처음 추출하는 리스트레또는 테스트용이다. 지난밤에 완벽하게 청소하고 밤새 잠들었던 머신을 깨우고 내 마음도 리셋 하는 시간이다.      


 두 번째 추출한 리스트레또를 다미타세 에스프레소 잔에 옮겨 담아 음미한다. 고소한 너트향에 그윽한 꽃향기를 흡입한다. 한 모금 머금고 커피 에센스가 혀와 잇새를 적시고 넘어가는 느낌에 온전히 몰입한다. 쌉싸래하고도 새큼한 뒷맛에 단맛의 후미까지.      


 오래 전에 배운 것을 정리해본다. 에스프레소는 뽑는 추출량과 시간에 따라 3가지로 나뉜다.

15~20ml 추출한 원액을 리스뜨레또라 한다. 바디감은 높고 끝에 추출되는 쓴 맛은 줄인 방법이기 때문에 더 강렬하고 꽉 찬 맛이다. 산미가 도드라져 밸런스로 보면 찌르는 맛이다. 자두의 짜릿함과 같은.      


노멀하게 30ml 추출한 원액을 에스프레소라고 한다. 베리 종류의 단향이나 허브향이 나고 맛은 가벼운 듯 밀도 있고 후미는 산뜻하다.      


룽고는 길게 40ml를 추출한 것을 말한다. 산미보다 바디감이 묵직하다. 향기도 초콜리티하거나 너티한 특징을 지닌다.      


또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원 샷을 뽑으면 솔로, 투 샷을 뽑으면 도피오라고 한다.     


 에스프레소에 더운 물을 추가한 아메리카노는 가장 흔하게 마시는 기본 메뉴다. 나는 주로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마신 후에 연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추억타령을 하면서 오늘의 브루잉을 시작한다. 겨울 장마인가 싶을 만큼 따스한 우기의 끝에 지난 주말 내린 눈으로 성큼 추워졌다. 덕분에 홍매가 피어난 희부연 여백의 한국화를 보며 겨울의 정서에 푹 빠져 있다. 커피를 두 배 맛있게 음미할 수 있는 진짜 좋은 계절은 역시 겨울이다. 사그라지지 않는 바리스타의 열정이 마음을 간질인다. 즐거운 일을 벌일 때의 기분이다.     


 분쇄

 핸드 드립을 할 때는 커피의 분쇄도가 너무 곱지 않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다. 입자가 반쯤 깨진 좁쌀 크기일 때가 브루잉도 용이하고 맛도 좋다. 가전을 고를 때 국산을 고집하는 나는 신일전자에서 나온 미니 믹서 세트에서 가장 작은 컵을 커피 분쇄기로 정해서 사용하고 있다. 나는 싱글 오리진 스페셜커피를 좋아하지만, 인복이 많아 커피 선물을 자주 받고 또 늘 차를 마시기 때문에 그걸 구입할 기회는 거의 없다. 딸이 석사논문을 쓸 무렵 함께 맛을 들인 블렌딩 커피 ‘버티고’ 원두를 며칠 전에 딸에게 한 봉지 받아놓았다. 떨어질 새 없이 내 것까지 채워주는 딸라미에게 늘 고맙다. 고소한 너트향의 블렌딩 커피 맛을 기대하면서, 분쇄도를 조절한다.      


물을 전기 티포트에 올려놓고 필터를 접어 드리퍼 안에 넣고 서버에 올린다. 끓인 물로 필터를 적셔 도구를 소독하고 예열한다.     


 분쇄된 커피를 드리퍼에 담고 커피 양과 같은 양의 숙수를 가운데부터 동전모양으로 확장하면서 천천히 붓는다. 30초가량 방치하면서 가스를 뺀 후에 브루잉한다. 나는 1인분에 60ml정도 추출한다.           




에스프레소 즐기기

 커피를 즐기는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이탈리안 스타일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따스한 물로 입을 헹구고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다미타세 크기의 예열한 잔에 15~20ml 덜어내 설탕을 소복히 붓는다. 설탕이 커피를 머금고 가라앉으면 흔들거나 섞지 않고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머금은 설탕은 농밀한 향기와 쓴 맛과 단 맛의 강렬한 조합 때문에 중독성이 있다.  

   

 무언가에 스며든다는 것, 다른 어떤 것과 일체가 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쉽고도 불가해한 일인가. 인간 세상에서는 관계 안에서 드물게 포착되는 현상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자기 경계를 허물고 상대에게 자신을 내주는 것,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종종 그 신비로운 일이 우발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교통사고처럼. 우리는 그런 사고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지나간 유행어로 말하자면 ‘금사빠’와 같은 일이다.     

 

 카페 머신으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 크레마가 살아있어서 더 드라마틱한 반응을 감상할 수 있다. 에스프레소 맛을 알아버린 그 날 이후 나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테스팅을 하느라 맛을 본 정도였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에스프레소에 중독되었다. 이후 더 맛있게 먹는 법을 알아가게 되었고, 나만의 방법을 가지게 되었다.      


 풍성한 크레마 위에 천천히 설탕을 붓는다. 크레마의 미색 거품을 머금은 설탕이 자취를 감출 즈음 현상은 역전된다. 설탕을 껴안은 크레마가 자신을 허물어 에스프레소 안으로 함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크레마와 설탕을 듬뿍 머금은 채 에스프레소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조명을 비춘다.      


 다미타세 잔을 들어 커피로 입술을 적신다. 혀에 감기는 산미와 함께 달콤한 향을 음미한다. 잔을 흔들어 두어 바퀴 돌린 후 한 모금 마신다. 가볍고 산뜻한 맛에 설탕의 단맛이 따라붙는다. 남은 커피와 설탕을 마신다. 쌉쌀한 커피에 녹아든 농밀한 설탕이 혀에 감기며 황홀하게 당도를 끌어올린다. 후미에 남는 향과 함께 비우자마자 다시 원하는 바로 그 맛.       


 에스프레소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아쉬움의 절정에 있다. 지극히 예민한 미각을 단번에 충족시키고 단발에 끝나버리는 것. 아쉽다고 두 잔을 먹을 순 없다. 하루에 한 잔, 두 모금이면 족한 스페셜 에센스, 우뇌와 좌뇌에 한 번씩 화살을 쏘아 깨워놓으면 정신의 톱니바퀴가 돌기 시작한다. 곧바로 두근두근 심장에 활력을 불어넣어 설렘과 기대로 아침을 출발시키는  것이다. 핸드 드립 커피가 아쉬운 점은 크레마가 제거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는 것이다. 좋은 점은 설탕 대신 꿀을 넣어 고급지게 음미할수 있다는 것이다. 또 독하지 않은 아메리카노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는 것이다.     









 커피감별사 과정을 공부하면 할수록 수렁처럼 넓은 세계를 확인하면서 어느 순간 발길을 멈췄다. 커피를 사랑하지만, 더 사랑하는 녹차와 동행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직도 오전엔 커피를 오후부터 밤까지 차를 마신다. 때론 아침부터 차를 마시는 날도 많다. 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각성효과를 원할 때는 커피를 찾는다.    


 커피를 마시면 밤잠의 방해를 받는데, 간섭받지 않는 시간대가 있다. 40대까지만 해도 오후 3시 안에 마시면 괜찮았는데, 요즘은 마지노선이 1시다. 자는 시간이 당겨진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앞으로 더 짧아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족한다. 좋아하는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으니까. 아직은 핸드 드립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을 얻을 수 있으니까.


오늘은 커피를 두 번 내렸다. 아침에 에스프레소를 마셨는데, 언니가 방문해서 점심에 또 내렸다. 덕분에 운좋게 동영상 촬영을 부탁해서 몇 장 얻었다. 블랜딩 커피는 싱글오리진 스페셜커피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딸이 주문해서 나눠준 버티고는 커피리브레의 베스트 상품이다. 인도 60%에 코스타리카 25% 온두라스 15%비율로 원두를 섞고 볶음도는 중강배전이다. 향기의 특징은 묵직한 초콜릿과 고소한 너트들의 조합이다.


이런 날도 있다. 커피를 두 번 내리는.

 언니는 에스프레소를 한 번도 마셔보지 않았다고 한다. 독한 것을 싫어하는 취향대로 아주 연한 보릿물처럼 희석해서 마셨다. 나는 두 번째 내린 커피로 에스프레소를 또 마셨다. 커피를 두 번 내린 것보다 에스프레소를 두 잔 마시는 것이 더 특별한 일이다. 오늘 밤은 잠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뭘 하지?

하고픈 일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걸 보니 히키코모리 성향이 다시 발동하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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