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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가객 Apr 21. 2024

맘 카페 뒤흔든 '그분'Ⅱ

4. K오지라퍼 K할머니 K참견러

기발한 복수


 새내기 맘카페 회원인 딸 A가 조횟수가 폭발한 카페 회원의 글과 댓글들을 보여주었다. 지난 회차에 발행한 사건 - 아기와 외출했다가 찬바람 맞춘다고 혼났던 - 이 일어난 지 얼마 후의 일이다.  


 맘카페의 한 회원이 아기를 안고 산책을 나갔다가 지나가는 할머니들에게 폭풍 잔소리를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신발도 안신기고 나왔냐였다. 아기는 발 있는 바디슈트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아기 엄마는 그 일로 마음이 몹시 상해 있었다.


 글 아래 많은 회원이 공감했다. 그중 한 분의 댓글이 눈에 띄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K할머니를 고문하는 방법이네요.”      


 그 댓글에 수많은 회원의 공감이 달려있었다.     


“맞아요. 저도 많이 당했어요. 그냥 무시하는 편인데, 날씨가 30도인데도 양말타령 하더라고요.”    


 “육아 문제로 K할머니한테 지적받으면 그냥 복수했다고 생각합시다!”     

 

  기발한 추임새까지 있었다. 육아에 지친 아기엄마들의 억울함과 저항감이 담겨 있었다.


 아기엄마들의 피로감도 이해가 된다. 또 한편으론 어르신들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내가 젊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때론 모멸감을 안겨주는 어르신들의 거친 표현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몸에 밴 예절로 수긍했다. 참견을 넘어 혼을 내며 가르치는 분들의 관심에 당황스러웠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고마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딸을 통해 별명을 얻은 나의 시어머님처럼 나도 손자가 있으니 K할머니다. 생각난 김에 K할머니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경험한 진짜 K할머니는 어머님이다. 함께 살아가는 동안 갈등이 없었던  아니다. 때로는 의견을 말씀드렸을 뿐인데, 말대답을 한다고 몹시 서운해하신 일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긴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 숨소리만 들어도 기분과 몸의 불편을 알아챌 만큼 이해하게 되었고, 어머님의 본성이 표현과는 달리 애정이라는 걸 알게된 후로는 크고 작은 불만들을 흘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 표현에 서툴러서 그렇지, 부모님의 사랑은 내가 짐작할 깜냥도 못 된다는 걸 갈수록 깨닫게 된다. 생래적으로 품고 있는 결핍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말은 곱씹어보면 사랑이거나 부탁이거나 미안하다는 메시지일 때가 많다.


이제 나 자신이 생애 발달주기에서 K할머니에 속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새삼 조심스러워진다. 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세대 간의 차이는 그 간극이 넓어지는 추세다. 환갑이 지나도 여전히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분들이 많다. 꽃중년이라는 말이 딱 맞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할머니’라는 말을 들을까 봐 엘리베이터나 주거단지 안에서 아이들을 만나도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는 분도 있다. 이건 정말 쇼킹한 뉴스다.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벽에는 인사를 권하는 멘트가 적혀있다.


‘먼저 인사하는 좋은 이웃이 됩시다’      


 메시지를 읽을 때마다 그 글의 의미를 생각한다. 늘 인사를 건네지만 일방적 인사로 끝나 어색할 때가 많다. 반색을 하며 눈을 맞추고 호응해주시는 건 나보다 연배가 높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남의 일에, 특히 아기나 연약한 이를 향한 과도한 참견과 개입을 서슴지 않는 현재의 노년 세대는 공동체인식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왔다. 전쟁과 경제적 어려움과 하는 사회 안에서 연약한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웃 공동체의 돌봄과 공익을 추구하며 벌여나가는 협력이 중요했다. 그런 노인을 부모로 둔 중년의 세대까지도 혈연, 지연, 학연 등 공동체 안에서 인연을 발전시키며 활동해 왔다.      


 공격적으로 보이는 K할머니들의 진심은 과연 무엇일까? K오지라퍼를 넘어 K참견러가 된 그분들이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얻는 유익은 없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과도한 참견을 하는 것일까. 경험에 비추어 아기에게 더 좋은 방법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참견으로 보이지만 아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표현 방법은 거칠기 짝이 없지만,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려는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분들도 존중받지 못했기 때문에 배울 기회는 없었을것이다. 하여   친절한 표현법도 익히지 못했을 이다.     .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면 좋겠다. 육아를 시작한 아기 엄마들은 맘카페를 통해 충분한 집단지성을 활용하고 있으며 아기를 돌볼 만큼 충분히 현명하고, 주변에 유용한 정보를 부어주는 경험자들이 존재한다. 또 기억할 것이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체의 센서는 무뎌진다. 노인이 되면 점점 더 추위와 더위에 민감해진다. 그러나 젊은 아기 엄마는 봄과 가을의 섬세한 온도차에 맞게 아기를 입히고 돌보며 적응시킨다. 육아의 주체에게 모든 책임과 권리가 있으니, 함부로 선을 넘지 않으면 좋겠다.


 




  'K~'에 대하여


 '우리'라고 표현되는 한국적인 문화에어느정도 강요가 포함되어 있음을 종종 느낀다. 그 속에는 과도한 당위'도 전제되어 있다. 세대가 바뀌고 사회가 발전되면서 패러다임도 변한다. 그만큼 앞선 세대의 수용성이 요구되는 시점애 와있음을 목격하곤 한다.  


 ‘K’로 시작하는 용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K는 한국을 의미한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논하기 위해 한국적인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알파벳 K를 접두어로 써서 명명된 것들이 될수록 긍정적 의미로 지칭되고 사용되고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긍정의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국뽕에 빠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 내용이 충실하게 채워졌으나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 알려져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위상이 더욱 밝게 다져지길 바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타자에 의해서 규정되었던 K 관련 용어들이 국내에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를 본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주거 형태도 1인 가구가 급증하는 상황이니, 개인화의 진행 속도가 생각보다 급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경험이 축적되면서 과도기를 맞이하는 행운을 확보했우리도 세대 간 이해와 적응이 가능했겠지만 그런 기회는 생략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지금의 불통은 서로 다른 세대가 함께 살아가면서 빚어내는 필연적인 갈등인 셈이다.              


 기성세대는 변화하기 어렵다. 나 역시 우리 세대의 인식과 관습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면한 개인주의 세대와 더불어 살기 위해 성숙한 개인주의를 체득해가야 함을 느낀다.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구입하는 것이 있다. 2023년 12월에도 <2024년 다이어리>와 『트렌드 24』 도서를 주문했다. 신간도서를 구입하면 짝꿍과 먼저 보려고 경쟁하는데, 올해는 짝꿍이 먼저 사무실에 가져간 책이 없어졌다고 해서 다시 주문해서 읽었다. 트렌드를 읽는다고 다 따라갈 순 없겠지만 트렌드를 미리 알고 이해라도 하면서 적응해가자는 생각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걸까? 자문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노인은 필연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물려줄 유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는 성취도 실패도 반복되었다. 우리 세대의 경험도 역사의 연속성 속에 가교역할을 할 것이며 우리의 실패는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책임감과 함께 무거운 마음으로 짚어본다. 명명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그 중차대한 영향력을. 우리가 어떤 현상을 보고 부정적인 상징을 담아 부르기 시작하면 그 대상에 포함된 그룹은 변명의 여지없이 ‘그런 류’가 된다. 의도 없이 비난에 합류하게 되면 적대적 관계로 고착되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그 대상을 부자유 속에 가두는 것이다. 대상뿐 아니라 나 자신도 부자유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나와 타자의 한계를 짓는 것이며 다른 해석의 여지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부정적인 명명의 위력이다.      


 간혹 정치권에서 생성되고 유통되어 유행어로 거듭나는 말들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다. 아름다운 한국어, 자랑스러운 한글이 담아내는 인식의 틀조차 오염시키는 말들을 사절하고싶다. 명명을 통해 세뇌효과와 프레임 씌우기가 행해지는 모습을 냉철한 시선으로 분별해야 할 필요가 여기 있다.      


 부정적인 명명에 나의 인식이 갇히거나 규명당하지 않으려면 끝없이 재해석하고 이미 확정된 부정적 의미의 자장을 부수고 새로운 의미를 담아 확장시켜야 한다. 이것이 작가의 사명이다.      


 지금까지 사용해 온 언어를 재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조형하고 의미를 새겨 넣는 연금술사의 역할이야말로 언어를 다루는 장인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믿는다. 창작이란 그러므로 이전의 것을 부정하고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개척하는 전위의 영역이다.      


 인간은 연약하다. 엄청난 악의를 가지고 계획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론 힘을 보탤 수도 있고, 반대로 선한 의도를 계획하지 않고도 누군가 시작한 위대한 일에 본성대로 참여할 수도 있다.     


 창의적인 이름 짓기가 유행하면 좋겠다. 긍정적이고 따스하며 처진 어깨를 일으켜 세우는 인간의 양심에 반하지 않는 신조어가 생성되고 유통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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