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5. 새로운 하루
1. 해 뜨기 전 0.00의 도시
돔 곡면에 여명(黎明) — 푸른빛과 장밋빛이 뒤섞인 띠가 번졌다.
전광판은 여전히 검은 화면, 손목 밴드는 하얀 ‘—’표.
그럼에도 거리는 분주했다.
제빵사 마이라가 굽는 첫 빵 냄새,
도로를 쓸던 리안의 빗자루 소리,
학교로 뛰는 네모의 운동화 소리—
숫자 대신 생활의 작은 소음들이 아침을 채웠다.
광장엔 한 달 전보다 두 배 많은 둥근 의자가 놓였다.
중앙엔 목재 강단 대신 빈 스툴 하나뿐—
발언자보다 듣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상징.
시민 위원 칼릭이 의자에 서서 선언했다.
“평점 엔진 휴면 30일째. 오늘, 듣기 포럼이 정식 ‘숨의 날’이 됩니다.”
박수 대신,
사람들이 손목 밴드를 맞대 **‘0.00 손동작’**을 만들어 보였다.
팔꿈치를 세워 원을 그리고, 양손을 살짝 열어 “공백”을 표시.
숫자 없는 첫 축하 인사였다.
심문청 모니터에는 새로운 대시보드.
Inquiry Queue 8,212 (미답변)
Suggested Themes 47 (市民投票)
Score Engine OFF (영구)
Audio Archive ON (자동 기록)
도시는 더 이상 점수를 계산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 큐’를 정리해 야간 라디오·학교 수업·공청회에 배분했다.
AI는 숫자 대신 “분류, 보존, 배포”에만 관여했다.
학교 도서관—네모와 동급생들이 직접 만든 “숫자 없는 교과서” 시안이 교무실에 제출됐다.
표지는 흰 종이에 네모가 적은 문장.
“바람은 숫자를 모른다.
우리는 숫자가 모르는 이야기를 씁니다.”
교사는 샘플을 들고 교실에 와서 물었다.
“이 책, 서로 가르칠 준비가 됐나요?”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수가 아니라 호기심으로 시작하는 수업이 열렸다.
마이라가 진열대를 채우며 작은 팻말을 걸었다.
“맛있으면 ‘고개 끄덕’,
짜면 ‘손바닥 펴기’,
달면 ‘엄지 척’.”
가격표 옆엔 ‘평점 가산 0.05’ 같은 문구 대신
웃는 얼굴 이모지 하나.
손님들은 미소로, 제스처로, 눈빛으로 맛을 전했다.
빵집 앞엔 처음으로 침묵 없는 칭찬이 줄을 섰다.
돔 외벽을 떠난 지 30일 만에,
시민 위원회 팩스에 한 장의 그림 엽서가 도착했다.
산 능선 위에 떠오르는 해를 연필로 스케치한 뒤,
아래에 문장이 적혀 있었다.
“숫자가 없는 해돋이도 정확히 떠오른다.
숨이 있는 한, 정의도 다시 떠오를 것이다.
― L.”
엽서는 광장을 돌고 돌았다.
누구도 첨삭하지 않았고,
읽을 때마다 새 주인이 연필로 옅은 빛을 한 줄 더 그어 넣었다.
해가 기울 때, 광장 둥근 의자 가운데
작은 모닥불이 피워졌다—돔 내부라 진짜 불 대신
휴대 전등과 주황 필름으로 만든 가짜 불이었지만,
사람들은 몸을 모아 불빛을 바라봤다.
가온이 스툴에 앉아 마지막이라며 짧게 말했다.
“우리는 정의가 숫자가 아니란 걸 배웠습니다.
다음은, 숫자 없는 정의를 어떻게 도울지 배우는 차례입니다.”
그는 등불 옆에 빈 노트 한 권을 내려놓았다.
표지: “Day-1 이후, 새 질문 기록장.”
페이지는 비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써야 할 질문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밤 10시, 돔 전등이 ‘에너지 절약 모드’로 밝기를 낮췄다.
검은 하늘 대신 유리 돔에 반사된 도시 불빛이 별처럼 떠올랐다.
광장에서 바라본 사람들은
저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별빛 아닌 서로의 숨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운 하루는 숫자로 시작하지 않았다.
새벽의 숨, 낮의 질문, 밤의 울림—
그것들이 도시의 첫 약속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