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4. 이레의 길
1. 빈 사무실
심문청 17층, 집행관 전용 집무실.
은 라펠이 사라진 제복 상의만 걸려 있고,
벽에는 “정의 평점 집계 현황” 대형 패널이 꺼져 있었다.
이레는 손가락으로 먼지를 가볍게 쓸었다.
창밖 광장은 둥글게 모인 사람들의 작은 점으로 빛나고 있었다.
“없어도 돌아가네…,”
그가 낮게 읊조렸다―
시스템도, 자신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묘한 안도와 함께 가슴을 파고들었다.
책상 서랍에서 초음파 인주와 봉인용 붉은 왁스를 꺼냈다.
집행관 사직서는 고위 서버에 입력하는 코드-폼이지만,
이레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자필로 썼다.
“질서란 숫자의 이름이 아니다.
듣지 않는 정의는 권력이었을 뿐.
나는 권력을 내려놓고, 질문을 배우러 간다.
– Lucian, I.R.”
서명 밑에 집행관 인장을 찍었다.
은 라펠 파편을 봉투에 함께 넣고,
“보관 대신 폐기” 도장을 스스로 찍었다.
코어룸 백도어 콘솔에 접속해
자신의 관리자 ID를 viewer(읽기 전용)로 강등했다.
로그가 뜬다.
ROLE_CHANGE : admin → observer
TOKEN_EXPIRY : permanent
이레는 키보드를 내려놓고,
모니터가 선명한 파란 창으로 바뀌는 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알림 창: “질문 버퍼 4,985건 대기. 답변 프로토콜 없음.”
“답은 도시가 찾아라.”
그는 속삭이듯 모니터에 말했다.
이레는 제복 아닌 검은 셔츠 차림으로
다시 동부 수로 제어실에 내려왔다.
냉각 파이프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벽에는 그가 가온에게 넘긴 ‘CUT-OVERFLOW’ 서류 파편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남은 파일을 모두 암호화해
“legacy_lesson.enc” 라 명명했다.
암호 키: “listen”.
도시 라디오 주파수 1180 kHz—
밤 11시 02분, 황량한 기타 선율이 끝나자
낮고 맑은 음성이 전파를 채웠다.
“여기는 Lucian.
나는 평생, 감정을 리스크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그 이름을 고칩니다.
감정은 숨이고, 숨은 질문이며,
질문은 정의가 태어나는 자리입니다.”
라디오와 광장 스피커,
그리고 시민들 휴대 단말이 동시 수신했다.
누구도 그 음성을 끊지 않았다―
감점 시스템이 없으므로,
라디오를 끄려는 이유 대신 듣겠다는 귀가 많았다.
방송이 끝나자 이레는 동쪽 정비 갤러리를 지나
가온이 빠져나갔던 외벽 서비스 리프트에 섰다.
손목 밴드를 입력하자 “observer” 권한으로 한 번만 상승 허가가 떨어졌다.
리프트가 외벽 데크에 닿자,
밤하늘 별빛이 유리 돔 곡면과 겹쳐 쏟아졌다.
바람이 제복 대신 셔츠를 흔들었다.
돔 밖 난간에 선 그는
양손을 난간에 얹고, 크게 들숨.
숫자로는 기록되지 않는 깊은숨이
폐를 채우고 천천히 빠져나갔다.
“숨을 들으려면, 밖으로 나와야 했군.”
도시 안쪽에서는
둥근 의자 모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레는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도 감점하지 못할,
숫자로 매길 수 없는 미소.
난간을 따라 외벽 정비 트랙이 북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 끝에는 돔 외부 유지보수 터널,
그리고 더 멀리엔 동 틈으로 드러난 산 능선.
이레는 짧게 뒤를 돌아
유리 돔 아래 빛나는 도시를 한 번 바라보고,
조용히 앞으로 걸었다.
각 걸음마다
집행관 구두 소리가 아닌,
질문을 배우러 가는 인간의 구두 소리가 울렸다.
“라펠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귀와 발걸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