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 사회의 대륙 (거짓의 재판소) #25

에필로그-3. 소년의 선택

by 공인멘토

1. 새벽 창가의 고민


동쪽 주거 블록 17층, 네모의 작은 방.
평점 창이 사라진 손목 장치는 책상 위에 벗어두었다.
창밖 돔 곡면에 비친 샛별을 바라보며,
소년은 두 손으로 낡은 소설책을 꼭 쥐고 있었다.

책갈피 사이엔 **‘숨 포럼 녹취’**를 인쇄한 작은 종이.
전날 네모가 낭독한 문단과,
듣기 모임 사람들이 남긴 “들었다.”라는 짧은 코멘트 137개가 빼곡했다.
숫자는 하나도 없는데,
네모는 태어나 처음 “인정받았다”는 감각을 느꼈다.



2.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


아침 7시 30분, 평점 없는 첫 등교일.
학교 정문엔 아직 교사들이 서 있었지만,
출석 스캔 기계는 ‘점검 중’ 초록 글씨만 깜박였다.

친구들이 웅성였다—
누군가는 “시험이 없어질까?”
누군가는 “학년 석차는?”
네모는 가방끈을 조여 쥐고,
교실 대신 도서관으로 방향을 틀었다.



3. 빈 서가에 꽂힌 낡은 팻말


도서관은 무인 관리 상태.
출입 게이트가 열려 있어,
네모는 인기척 없이 서가 사이를 걸었다.

‘필독 도서—평점 0.05 가산’이라는 플라스틱 팻말이
책장 한가운데 비스듬히 매달려 있었다.
네모는 팻말을 내려 책장 뒤 상자에 넣어두었다.
그 자리에 연필로 적었다.

“필독 이유: 읽고 싶은 마음.”



4. 소설 ‘바람은 숫자를 모른다’ 대여 로그


도서 검색 단말기에 학생증을 대지 않아도,
책 뒷표 바코드는 스캔되었다.
단말은 대여자 정보를 빈칸으로 두고,
‘열람 인증 없음’이라고만 기록했다.

네모는 소설을 품에 안고
외부 정원 벤치로 나왔다.
시나몬 나무 냄새가 바람에 묻었다.
산책하던 제빵사 마이라가 지나가다 웃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야?”
네모가 책을 번쩍 들어 보였다.
“여기, 숫자가 안 나오는 모험담이에요!”

마이라가 빵 봉투를 건넸다.
“그럼 이야기 끝나면 맛 점수 대신 입맛 점수 부탁해.”
둘은 아무 숫자도 없이 웃었다.



5. 선택의 순간


정오, 학교 방송이 깜빡거리며 새 안내를 띄웠다.

“오늘 3교시, 동아리 신청 설명회 대신 ‘자율 탐구’ 시간.
희망 학생은 광장 듣기 모임 참관 가능.”

교실 안 30명 중 열두 명이 몸을 일으켰다.
네모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멨다.
교사가 출석부 대신 열 명 남짓한 이름을 수첩에 쓰며 말했다.
“점수는 없지만, 이유는 적어두자.
왜 듣고 싶은지?”

네모는 종이에 한 줄 썼다.

“숫자가 모르는 이야기를 배우고 싶어서.”

교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네모는 집단으로 광장으로 향하는 친구들 사이에 섞여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몸이 가벼웠다—
녹색 램프도, 경고음도 발목을 잡지 않았다.



6. 광장에서의 두 번째 낭독


오후 1시, 원형 의자 가운데엔
“오늘의 작은 목소리”라는 종이 팻말이 놓여 있었다.
네모가 망설이다 손을 들었다.
“저… 어제 이어서 읽어도 될까요?”

사람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모는 책장을 펴고,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 문단을 읽었다.

“숫자가 사라진 바람은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 그건 잎사귀가 아닌 심장을 흔드는 음이었다.”

읽는 동안 그의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홀로그램 패널이 켜지지 않아도,
감정 지수 패널 없이도,
숨소리가 공명을 만들었다.



7. 기록팀 0.00의 업로드


듣기 모임이 끝나고,
전날 음성 파일을 올렸던 학생 둘이
이번엔 네모의 낭독을 녹음해 “score00-day2”로 업로드했다.
조회 2시간 만에 “들었다.” 2 000+ 코멘트.



8. 소년의 마지막 메모


네모는 집으로 돌아와
책갈피 뒤에 메모지를 꽂았다.

“이야기를 읽으면,
숫자 대신 사람이 듣는다.
오늘 나는 ‘듣는 사람이 있을 자유’를 선택했다.”

그리고 손목 밴드 화면을 꺼버렸다.
숫자가 꺼진 검은 화면보다,
책 페이지가 더 밝게 보였다.

“소년은 숫자 없는 책을 펼치며,
숨을 읽고 숨을 읽히는 첫날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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