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A가 갑작스럽게 부산행 버스표를 끊은 것은 밤이 새벽으로 막 바뀌는 때였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여느 사람의 그것과는 크게 달랐다. 아니, 애초에 평범한 이유였다면 당일에 갑자기 연차를 내면서까지 버스표를 끊는 무모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그랬어.
유리잔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손으로 대충 닦아내며 A는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바다보다는 파도가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냥 파도가 아니라, 사람과 힘겨루기를 해보겠다는 양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가 보고 싶었다고, 저 멀리 소리에서부터 큼지막한 물결을 끌고 와서는, 닿는 곳을 말끔히 닦아주는 그것을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고, A는 덤덤하지 못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말했다.
A가 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발걸음을 내딛은 곳은 해운대였다. 굳이 해운대일 필요는 없었지만, 제일 가까운 곳이 해운대라서 그랬다고 했다. 여름 바다를 즐기러 온 사람도, 새해 해돋이를 보러 온 사람도 없는 겨울아침의 해운대는 꽤나 한적했다. 바글바글한 인파가 발자국을 잔뜩 남겼을 모래사장에는, 곱게 정돈된 모래 위로 이따금씩 지나가는 파도만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언제 지나갔었냐는 듯이.
파도가 신발코를 간신히 적시는 지점에서, A는 자신의 발을 에워싸는 신발과 양말 따위를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파도가 여러 차례 휩쓸고 가 물기가 진득하게 남은 모래 위에 발자국을 잔뜩 남기기 시작했다. 파도가 들이닥치기 일보직전이 되었을 때, A는 황급히 마른 모래 위로 발을 옮겼다.
진짜 어떻게, 발자국이 그렇게 흔적 하나 남지 않고 사라지지?
허공을 응시하는 A의 눈빛에서 해운대의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철썩, 하고 밀려왔다가 솨아, 하고 밀려나는.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고 했다. 발자국을 새기고, 철썩, 솨아, 사라지고, 새기고, 철썩, 솨아, 사라지고. 그러다가 이어폰 한 쪽을 실수로 떨어뜨렸다고 했다. 그것을 알아채고 허리를 굽혔을 때에는, 유독 거센 파도가 물보라를 일며 자신을 향해 밀려왔다고 했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파도가.
입안의 소금기를 연신 뱉어댄다. 얼얼한 바닷물에 눈물을 줄줄 흘린다. 목구멍까지 들이친 매캐한 것에 기침을 연신 콜록이며 A는 손을 휘적거리고 힘겹게 마른 모래 위로 몸을 꺼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몇 번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A는 몸에 묻은 모래를 탈탈 털고는 아까 자신을 덮쳤던 그 파도가 있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철썩, 솨아. 바닷물을 머금어 살짝 칙칙해진 모래만이 있을 뿐이었다. 처음의 그 곱게 정돈된 모습 그대로였다. 열심히 새겼던 발자국도, 실수로 떨어뜨린 이어폰도, 파도에 실려 이미 저 멀리 밀려나갔을 것이다. 그런 바다를 바라보는 A의 눈에는 어떤 원망도 섞여있지 않았다. 아니, 어떤 감정도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그저 멍하니, 흔적이 가득했던 그 자리를 휩쓸고 간 파도가 다시금 저 멀리서 오는 것을 볼 뿐이었다. 철썩, 솨아.
A는 손에 모래를 한 움큼 살포시 집어 들어올렸다. 잠깐 손 위에 남아있던 그것은 이내 파도가 뒷걸음질치듯 솨아 소리를 내며 손 안에서 이내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황급히 오므린 A의 손바닥에 겨우내 남은 몇 톨의 먼지 조각들마저 등 뒤에서 불어온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모래를 쥐었던 자리도 이내 바람이 빠르게 뒤덮었다.
무엇도 남지 않았어. 아니, 애초에 남길 게 없었는데.
A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에 잔을 가져다 댔다. 무슨 음료건 물같이 마셔대는 그의 습관 덕분에, 커피가 들었던 A의 컵은 얼음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거의 녹아 물이 되었던 것을, A는 쭈욱 들이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찬물에 머리가 띵해졌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스르르 열린 그의 눈에서는 눈꺼풀이 밀물과 썰물을 일으켰다. 철썩. 솨아. 파도와 모래만이 남은 해운대 앞바다를 담은 A의 눈에서 안광이 얼핏 보였다. 발자국이 남은 모래사장 너머의 파도가 그의 눈동자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철썩. 솨아.
애써 사라지길 바랐던 흔적이 있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그렇게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사라진 흔적이 있다. 사라졌으면 하는 것이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건 흔적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 ‘흔적들’을 보내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이런 글을 쓰다 보면 문체가 우울해지고, 마무리가 어영부영 되곤 한다. 그래도 최대한 의연하게 끝내고 싶었다. 내 글이 항상 그래왔듯.
최근 대화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너무 자주 사용한 것 같아, 최대한 대화를 지양하고 상황 서술만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했는데, 역시 힘들다. 인간은 불편함을 피하는 동물이라던데, 쓰다가 몇 번이나 대화체로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을 보면 맞는 것 같다. 그래도 어찌저찌 마무리를 지었는데, 막상 다 완성하니 내 마음 속 작은 독 짓는 늙은이가 글을 깨부수러 오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간만에 긴 글을 쓰니 오늘 잠은 잘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