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_ 이효석
달빛이 들판을 은빛으로 물들 때,
하얀 메밀꽃들이 바람결에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빛과 향기 사이에서 이효석의 문장은 살아 숨 쉬며 책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메밀꽃 필 무렵』]속 허생원은 평생 장터를 떠돌던 사내다.
그의 걸음은 늘 낯선 길 위에 있었지만,
그 밤만큼은 달빛과 꽃향기에 이끌려 잠시 멈춰 선다.
그곳에서 그는 젊은 날의 사랑,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놓고 온 생의 한 조각과 다시 마주한다.
그 장면은 단순한 회상의 순간이 아니다.
허생원이 걷던 길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세상과 사람 사이를 떠돌던 발걸음은
달빛 아래에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삶의 끝에서 되돌아보면, 우리가 그토록 멀리 걸어온 이유는 결국 돌아가기 위해서였음을 알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밤을 맞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머뭇거릴 때,
어느 풍경 하나가 마음을 붙잡는 순간이 있다.
허생원을 마주하며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속 주인공 '나'...
그에게 그것은 안개였다.
무진의 안개는 허생원의 달빛처럼 부드럽고 낯설며,
자신을 감추고 동시에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는 그 안갯속에서 잊고 지낸 ‘나’를 마주한다.
달빛과 안개, 서로 다른 빛과 흐름이지만
둘 다 삶의 소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자연의 숨결이었다.
그 속에서 사람은, 오히려 자기 안의 소리를 듣게 된다.
이야기는 다시 숲으로 이어진다.
또 한 명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
그가 머물던 월든 호숫가.
그는 세상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삶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마주하려 했다.
자연은 그에게 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삶이 다시 단순해지고 투명해지는 자리였다.
그가 숲에서 배운 것은 고요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감각 그 자체였다.
허생원의 달빛, 무진의 안개, 월든의 숲—
세 시대의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길 위에 있었지만,
모두 같은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았다.
자연은 늘 우리보다 먼저,
말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의 마음이 그 고요를 알아볼 때,
비로소 길은 멈추고, 삶은 다시 숨을 고른다.
삶은 언제나 완성보다 이해를 향해 걷는다.
그리고 그 길의 어느 밤,
메밀꽃이 다시 필 무렵이면 우리는 잠시 멈추어
그저 바라볼 뿐이다.
바라봄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숨 쉬는 일보다 훨씬 더 섬세한 일이다.
기억을 품고, 잊힌 것들을 다시 불러내며,
조용히 스스로를 이해해 가는 일일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결론도, 다짐도 없다.
다만 달빛이 스러지고,
바람이 잦아드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고요한 마음으로
다시 다음 날의 길을 걸어 나선다.
그 길에서 마음을 나누는 이를 만나는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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