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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May 18. 2023

마약은 하지만, 마약쟁이는 아니에요

CRPS 환자의 투병 에세이 15

CRPS와 마약은 실과 바늘 같은 관계이다. 그 어떤 질병도 의심 단계에서부터 마약을 처방하지 않지만, CRPS는 예외였다. 그만큼 CRPS 통증은 마약성 진통제 없이 버틸 수 없는 수준으로 강하게 찾아온다.


마약성 진통제에 대해서는 의료진마다, CRPS 환자마다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마약성 진통제를 직접 경험한 나의 의견은 마약성 진통제도 분명 ‘마약’이다.

그럼에도 'CRPS 환자에게는 마약성 진통제가 적극적인 치료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약이나 치료의 도움 없이 통증을 계속 참을 경우, 신경이 이를 기억하고 악화시키는 결과를 불러온다. 적절한 타이밍에 환자에게 맞는 종류와 용량의 진통제는 치료제로 작용한다. 흥분되어 있는 신경을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마약성 진통제와 향정신성 의약품을 과하게 처방하고 사용하는 것은 무조건 지양해야 한다. 그러나 CRPS의 통증은 참는다고 호전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전이*되는 것을 경험했다.


가끔 사람들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나에게 물어보았다.

"마약성 진통제를 먹으면 마약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모르핀을 맞으면 마약 한 것 같아?"
나의 대답은 항상 "NO"였다.


'마약성 진통제'에서 일부 사람들은 '마약성'에 집중한다. 하지만 통증 환자에게는 '진통제'의 역할로 작용할 뿐이다.

통증이 극심한 상태에서 마약류 주사를 맞으면 그제야 일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요동치는 혈압과 심장박동수는 정상 수치로 돌아오고, 드디어 숨을 편히 쉬며 온전한 사고를 하게 된다.


CRPS 환자들은 마약성 진통제를 장기간, 고용량으로 사용하게 된다. 경구약뿐 아니라 주기적으로 주사를 맞는 과정에서 의료진과 마찰이 생기기도 한다.

병원에 가서 진료보고 주사 맞는 행위가 과연 얼마나 즐거울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아프고 싶어 하지 않는다. CRPS 환자 또한 마찬가지일 뿐이다. 주사의 부작용을 감내하는 것 또한 온전히 환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치료방법이 ‘마약성 진통제’라는 이유만으로, 눈치보며 다녀야 할 때가 있다.


나의 담당 의료진분들은 정말 너무나도 감사한 분들이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하다. 아픈 몸만 치료해 주시는 것을 넘어, 병원을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할 만큼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그런데 투병 중 '아픈 게 죄구나'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담당 교수님께서 장기간 연수를 가신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른 교수님께 담당의 변경이 되었다.


진료실에 들어가 현 상황을 말씀드리고 무언가 더 치료받을 수 있는 게 없는지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바뀐 교수님으로부터 정확하게 이런 말을 들었다.

 “저는 병원에 고용된 일개 월급쟁이 의사일 뿐이에요.
그런 저한테 뭘 그렇게 많이 바라고 계시나요?”

이 말을 듣자 너무 서러운 나머지 울며, 다시 교수님께 질문하였다. "교수님은 통증으로 단 5분밖에 자지 못하는 생활을 몇 달째 이어나가도 버티실 수 있으신가요?"

교수님은 답하셨다. "네. 저는 버틸 수 있습니다."

할 말이 없었다. 죽고 싶어할 만큼 아파하는 내가 병원에서 들은 말이었다.


이제까지 많은 환자들이 '항상 환자가 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공감하지 못했다.

나를 담당해 주시는 선생님들은 오히려 "소민아. 내가 무얼 더 해줄 수 있는 게 있을까?"라고 물어봐 주셨다. 감사하게도 진심을 담아 치료해 주시는 의료진분들만 만나 왔는데 충격이었다.


그 당시 내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수 있다. 또한 나를 처음부터 진료해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환자 이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나온 말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마약'으로 치료해야 하는 환자이기에 더 엄격한 기준으로 대응하셨을 수 있다.


절대 CRPS가 마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악용되면 안 된다. 그것만큼 CRPS 환자들을 비참하고 억울하게 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정확한 진단 하에 확진 받은 환자에게는 생명을 지켜낼 수 있도록 의료진의 도움이 필요하다.


주의할 점은 환자에게도 주사 치료가 습관이 되면 절대 안 된다. 스스로 주사 용량과 횟수를 줄일 수 있는 상태인지 계속해서 살펴야 한다.

환자 본인은 안다. 나의 통증 상태가 어떤지. 만약 호전 궤도에 올라섰다면, 몸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감량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는 환자가 해야 하는 치열한 투병 과정 중 하나이다.


아픈데 마약을 줄이는 과정은 매우 지치고 서럽고 처절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평생 CRPS 환자로서 마약성 진통제를 맞으며 살 수 없기에 싸워내야 한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환자의 의지가 필요한 부분이다.

나는 CRPS 통증 경감이 목표가 아니라, '아프기 전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목표이다. 당장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현실일지라도 목표를 세워 달성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반대로 CRPS 환자 중 마약성 진통제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번 이 약을 시작하면 끊을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경구약은 어쩔 수 없이 먹더라도 모르핀 주사만큼은 맞고 싶지 않은 마음, 더 나아가 케타민* 치료는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등.. 나 또한 같은 생각을 했었다.


현 상황에서 ‘통증 감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니 결정하기 수월했다.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물론 한번 시작한 마약을 끊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필요하지 않다면 당연히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의료진의 처방을 믿고 따르는 것 또한 필요한 자세이다. CRPS 통증은 본인의 의지로 조절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통증은 좋아진다면 본인의 의지에 따라 약을 줄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마약성 진통제를 무분별하게 처방하는 상황을 기사로 접할 때마다 마음이 무너진다. 심지어 확진 전부터 마약 처방이 가능한 CRPS라는 질병을 마약쟁이들이 이용하는 문제를 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정작 통증으로 삶을 살아내기 어려운 환자들의 마약성 진통제 규제가 강해지고 있다.


CRPS가 마약쟁이들의 도구가 되는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전이: 기존 통증 부위로부터 다른 부위로 퍼져 나가는 것. (이전 글 참조: 누가 저 좀 죽여주세요)

*용량 제한: 대표 사진에 적힌 대로 케타민은 최대 주 1회, 모르핀은 최대 주 3회로 제한되어 있다. 약물 용량은 담당 의료진의 진단 하에 정해지게 된다.

*케타민: 마약류에 속한 향정신성 의약품. (이전 글 참조: 3시간과 맞바꾼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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