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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Jun 01. 2023

몸이 아파서 정신과에 갑니다

CRPS 환자의 투병 에세이 16

CRPS 치료 초기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님은 정신건강의학과가 통증 조절에 도움 된다며 조심스레 협진을 권해주셨다.

나는 '치료에 도움만 된다면 뭐든지 좋다'고 답변하였다. 그러자 교수님은 좋은 결정이라고 칭찬해 주셨다. 동시에 아직까지도 정신과 진료받기를 꺼려하는 환자들이 많다며 아쉬워하셨다.


정신과도 하나의 진료과일 뿐인데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투병하며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아직도 '정신과'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이 존재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정신과의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현실에서 정신과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조금 흠칫해하였다. '누군가는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어. 그런데 나와 가까운 지인일 줄이야'라는 생각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정신과 진료는 여러 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중 1) 심리적 치료 2) 전문적인 약제 조절로 나누어 내가 경험한 정신과 진료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1) 심리적 치료

아프기 이전 나는 어려움을 맞이할 때마다 '시련을 극복해 내는 재미가 있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했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CRPS는 차원이 달랐다.

CRPS 통증과 함께 찾아오는 심리적인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항상 행복하기만 했던 나의 머릿속에 어느 순간, 자살과 자해 등 어두운 단어들이 가득 차버렸다.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나에게 교수님은 말씀해 주셨다.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삶 속에서 몇 번의 파도를 만나면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돼. 하지만 CRPS 환자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쓰나미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상황이야.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자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겠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해."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 상황에 놓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은 큰 위로로 다가왔다.

신체적인 변화에 따라 심리적인 변화는 당연한 것이었다. 교수님 덕분에 투병 이후 달라진 나의 생각과 모습을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 진료실에 들어가자 교수님은 물어보셨다

"코로나 걸려서 죽고 싶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교수님! 제 마음을 읽고 계시네요. 당연하죠"


과연 ‘죽고 싶다’는 말을 누군가와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웃으며 대화 나눈다고 해서 처한 상황이나 문제 자체를 가벼이 여기신 것이 절대 아니다. 교수님은 내가 24시간 내내 ‘자살’ 생각만 한다는 CRPS 환자임을 아셨고,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셨다.

교수님에게마저 솔직한 심리 상태를 전부 털어놓지 못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말하기 무거운 문제에 대해 편하게 말하여 위험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해주셨다.


2) 전문적인 약제 조절

통증 조절을 위한 약의 종류는 정말 다양했다. 투병 기간이 길어질수록 약의 종류 및 개수가 많아져 하나의 진료과에서 모든 약을 처방할 수 없는 상태에 다다랐다. 결국 여러 진료과 협진을 통해 약제 처방이 이루어졌다.

그중 정신과 교수님은 수면 및 신경 조절 약제를 전문적으로 도맡아 처방해 주셨다.


수면제의 세계는 신비했다. 잠을 유도하는 약, 잠을 지속하는 약, 잠을 깊게 잘 수 있도록 하는 약 등 '수면'을 위해 다양한 접근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꿈을 덜 꾸게 해 주어 수면의 질을 향상시키는 약까지 존재했다.

교수님께서는 거의 매일같이 잠을 못 자는 내가 단 몇 분이라도 더 잘 수 있도록 최적의 약제를 조합하여 처방해 주셨다. 정신과 진료를 보지 않았다면 대중적인 수면제만을 처방받아 세밀한 접근이 어려웠을 텐데 감사했다.


CRPS 특성상 교감 신경이 비이상적으로 날뛰고 있어 이를 가라앉혀야 한다. 교감 신경의 흥분을 떨어뜨리기 위해 상황에 맞는 약제 처방이 이루어졌다.

생활 속에서 평온한 마음가짐과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별개로, CRPS 통증은 아주 작은 감정 변화에도 악화된다. 감정 변화로 인한 통증 악화를 막기 위해 필요시 추가 복용하는 약을 같이 처방받았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향정신성 의약품*이 많이 처방된다. ‘마약성 진통제'와 비슷한 수준의 위험성이 있어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약은 상태가 호전되면 얼마든지 끊을 수 있다. 담당 교수님과도 약 용량 및 종류에 대해 매번 같이 논의 후, 상황에 맞게 처방받았기 때문에 믿고 복용하였다.


정신과의 특이점은 환자마다 잘 맞는 의료진의 편차가 있다는 사실이다.

투병 기간 중 통증 환자 전문 심리삼당사분을 추천받아 상담받으러 다녔었다. 심리삼당사분은 내가 말을 할 때마다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쳐다보셨다. 이는 공감과 안쓰러움의 표현이셨겠지만, 내가 정말 심각한 상황에 처한 기분을 느껴 또 다른 답답함만 얻게 되었다.


반면 정신과 담당 교수님은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던 '그럴 수 있어'가 기본 태도셨다. 단순한 감정 공감을 넘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결책을 제시해 주시는 모습에 안정감을 받았다.

다른 환우분은 오히려 교수님의 이런 태도가 차갑다고 느껴져 다른 교수님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신과 진료에서는 자신과 잘 맞는 의료진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상태가 호전되자, 교수님은 종종 이 조언을 해주셨다.

사람이기에 모든 것은 가능하다.

한계점이 없는 사람이기에 이 순간까지 통증을 버티며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기에 저주받은 질병이라 불리는 CRPS와 함께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라며 나에게 계속해서 도전을 주셨다.


몸이 아픈 건 금방 알아차리지만 마음이 아픈 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몸이 아픈 것을 치료하느라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있는 상황을 방치하기도 한다.

하지만 통증 치료는 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향정신성 의약품: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로, 마약류의 범주 내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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