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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y 08. 2024

각시붓꽃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꽃

 이름처럼 꽃도 예쁘다. 수줍은 듯 햇살 좋은 산자락 귀퉁이에 옹기종기 피어 내 눈길을 사로잡는 각시붓꽃. 멀리서 보며 여기저기 지천으로 피어 뽑아내고 뜯어내도 피는 반지꽃인 줄 알았다. 시백모님의 기일이라 산소를 찾았다. 4월의 햇살은 청명하고 연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산자락이 더없이 싱그럽다. 잘 가꾸어진 드넓은 산소가 위용을 자랑하며 자손들의 손길이 모자라지 않았음을 과시한다. 올해는 잡풀도 많지 않고 얼마 전에 낙엽도 치운지라 말끔하다. 매년 뽑아내는 반지꽃만이 버티고 있어 잡초라는 이름으로 모두 제거해 줄 참이었다.


 반지꽃은 번식력이 어찌나 출중한지 몇 포기 나오나 싶더니 산을 뒤덮을 심산이다. 몇이 달려들어 뽑다가 발견한 작고 예쁘게 피어있는 보랏빛 각시붓꽃. 가까이 다가가 보고서야 반지꽃이 아닌 것을 알고는 차마 뽑아버릴 수가 없었다. 바람결에 실려왔는지 저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의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랏빛 각시붓꽃이 보란 듯이 자리를 잡았으니 너무 예쁜 나머지 차마 뽑아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래 집으로 가자. 우리 집으로 가자. 귀한 인삼이라도 되는 양 주위를 솔솔솔 조심스럽게 파내며 떠내려 하지만 튼실한 수염뿌리로 버티며 이곳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지 꼼짝을 하지 않는다. 처음 본 인간에 낯가림이라도 하는 건지, 나는 못 가네 시위를 하는 건지, 그래봐야 뽑혀서 버려지기 전에 가자고 어르고 달래 집으로 데려왔다.




 붓꽃은 자라면 키가 60cm가 넘지만 각시붓꽃은 겨우 10~20cm밖에 안 되는 귀여운 꽃이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려앉은 인적 드문 양지쪽에 옹기종기 모여 봄날을 노래하는 각시붓꽃. 마치 수줍은 새색시들이 봄나들이를 나온 것처럼 꽃잎들을 마주하며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소곤소곤 정겹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의 구름들 몽글몽글 사랑스럽게 피어난다. 애틋한 연인들의 밀어처럼...


 각시붓꽃의 전설도 꽃만큼이나 아름답다.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서 전사한 관창과 결혼을 약속했던 무용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관창이 돌아오지 못하자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그의 무덤에서 슬픈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끝내 슬픔을 이기지 못한 무용은 홀연히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이를 가엾이 여겨 관창 옆에 묻어 주었더니 이듬해 봄에 무덤에서 보라색 꽃이 피어났다. 이 꽃의 모습이 새색시 무용을, 잎은 관창의 칼을 닮았다 하여 각시붓꽃이라 불렀다 하니 모양새도 그럴듯하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각시붓꽃은 약재로도 쓰이며, 꽃말은 "기쁜 소식, 부끄러움, 사랑의 메시지, 존경" 등이다. 한국이 원산지라는데 오늘은 누가 기쁜 소식이라도 전해주려나 설레는 하루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무렵 산소에 같이 갔던 둘째 시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수님께서 아직까지 두릅을 못 드셨다고 해서 산에서 따왔다며 가져오겠다 한다. 벌써 먹고 싶어 진다.


 시골집 주변에 아버지께서 생전에 심어 놓으신 나무에 두릅이 여기저기 수없이 나왔을 텐데 돈 주고 사 먹기가 왠지 아까웠다. 그냥 사 먹어도 될 것을 유난이다. 괜스레 바쁜 시동생이 일부러 형수 주겠다고 가시에 찔려가며 두릅을 채취한 생각을 하니 고맙고도 미안하다. 두릅에 귀한 오가피순까지 따서 보냈다. 오가피순은 제2산삼이라 불리며 효능도 많다는데 쌉싸래한 맛을 적당히 우려서 보약처럼 먹어볼 참이다.




 부끄러운 듯 어여쁘게 피어있던 각시붓꽃. 그렇게 그리던 님 곁에서 도란도란 사랑의 메시지라도 주고받는 걸까. 먼저 가신 시백모님, 간절히 소망하자식하나 보지 못한 채 평생을 마음 졸이며 살아온 한 여인의 고단했던 삶. 양자로 자식을 들였지만 그 자식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신적이라도 있었는지, 시동생은 그저 옅은 웃음으로 답할 뿐이다. 다만 자식이라기보다는 머슴처럼 온갖 일을 하며 고단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을 풍문처럼 들었을 뿐이다.


  시백부님에 대한 소문들도 무성했다. 어딘가에 여자가 있다더라. 어디에서 씨앗을 봤다더라. 그때마다 시백모님께서는 두 눈에 쌍불을 켜고 시백부를 닦달해 대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곤 했다. 당신 자식을 보못했다는 것만으로 하루 한 시 마음 편할 날 없이 사시다 가신 분. 누가 그 어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비록 큰 조카며느리가 낳은 자식이지만 당신은 안아본 적 없는 갓난아기를 안고 그리도 좋아하셨었다. 울지도 안는 아기를 안고. 업고 어르며 주름진 얼굴이 잠시나마 꽃처럼 피어나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얼룩진 세월을 살아온 탓일까. 너무 일찍 먼 곳으로 떠나셨다. 참 많이도 울었다. 시백모님의 인생이 안쓰러워서, 멋모르고 시집와 맥없이 살고 있는 내 모습이 서러워 여기 이곳 산자락에 묻히시던 날도 목놓아 울었다. 제 설움에 겨워 운다 했던가. 전혀 다른 환경 속으로 걸어 들어와 한 식구로 살아간다는 것이 물과 기름이 섞이는 것처럼 쉽지 않은 길이었다. 기어이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는 버겁기만 했다. 뒤이어 시백부님께서도 가시고 그렇게 평생을 투닥거리며 사셨어도 끝내는 나란히 누우셨다. 이제 더 이상 한 눈 팔 곳도 없고, 오직 두 분만이 그곳에서 각시붓꽃처럼 조금은 부끄러운 듯이 수줍게 꽁냥꽁냥 그렇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생전에도 멋쩍은 웃음으로 대신하곤 하시백부님의 푸근한 웃음소리가 들리는듯하다.




 각시붓꽃을 만나 집으로 데려오고 기쁜 소식과 함께 봄나물이 선물처럼 내 집에 왔다. 4월의 푸르름만큼이나 파릇파릇 생기가 돌고, 마음도 따뜻해지는 시간들이다. 내 집으로 왔으니 이곳이 너의 보금자리이고 물을 좋아하는 너에게 때마다 수분을 채워주며 사랑으로 보살피겠노라 약속을 해본다. 각시붓꽃의 꽃말처럼 존경까지는 어렵더라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땅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의 언어로 마음을 전하고, 함께 가는 세상이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해질 날을 꿈꾼다. 맑은 바람이 스치고 파란 하늘빛구름사이로 소리 없이 번져간다. 내 마음도 그러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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