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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Jun 24. 2023

나를 성장시킨 대학생활

내가 대하는 공부방식

4학년 2학기 마지막 기말시험이 있던 날. 지난밤 12시까지 다시 한번 오답노트와 주요 내용만 정리해 둔 노트를 확인하고 잠이 들었다. 오늘은 좀 더 일찍 일어나 씻고, 화장까지 곱게 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 만큼 당당하게 집을 나섰다. 밤새 공부하느라 피곤에 절은 얼굴에, 머리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학우들. 그래도 마지막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시험을 보았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모두 승리자였다. 쉼 없이 4년을 또는 중간에 잠시 휴학을 했었을지라도 결국 졸업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방송대라는 특성상 졸업률이 극히 저조함에도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학업까지 병행하며 끝까지 버텨낸 학우들이 자랑스러웠다. 나 역시 4년을 열심히 달려온 만큼 원 없이 공부했고, 가슴 벅차도록 행복했던 시간들로 남아 있다.




시험이 다가오면 커다란 책상 위에 책들을 모두 꺼내놓고 차례대로 읽는다. 두 번째로 읽을 때는 시험에 나올법한 내용은 형광펜으로 색을 입힌다. 세 번째로 읽으면서는 그 내용을 노트에 간단하게 정리해서 필기한다. 물론 이 노트는 완전히 이해하고 숙지할 때까지 읽는다. 그리고 기존에 출제되었던 문제들을 모두 출력해서 풀기 시작한다. 오답노트도 작성하며 시험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렇게 4년을 시험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매달려온 시간들이었다. 어찌 보면 효율적이지 못한 공부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자신이 머리가 특출 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오직 노력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더구나 늦은 나이에 도전했기에, 가난해서 못했던 공부를 한풀이라도 하듯이 미친 듯이 했던 것 같다. 덕분에 매 학기마다 장학금을 받았고, 4년 성적우수자로 상을 받았다.




학생상담자원봉사자가 되어 교수님의 상담이론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상담이란 것이 무엇인지 일 푼어치도 모르고 발을 들였었다. 신화에 나올법한 이름들로 칼 구스타브 융, 프로이트, 에이브러햄 슬로우, 아들러 등등 듣도 보도 못한 분들에 이론이 나열되며, 나를 점점 더 작아지게 했다. 그렇게 방학을 이용한 보수교육을 받으며 나의 무지와 부족함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이미 모든 교육을 마치고 시작된 학생상담자원봉사자의 길. 학생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누군가를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열정만으로 밀고 나가기에는 너무 내재되어 있는 것들이 빈약했다. 더 많은 것들을 나누기 위해서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봄날에 씨앗처럼 딱딱한 껍질을 뚫고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 싹들도 생명수를 품어야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우듯이, 더 많은 것을 배워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내가 왜 배우고 싶은지, 무엇을 위해 배우고 싶은지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어느 과를 선택할 것인지도 선명했다. 입학지원서를 다운로드하여 작성하고, 성적이 포함된 고등학교졸업증명서를 첨부하여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00 캠퍼스 교육학과(3학년 때 과 분리로 청소년교육과 선택)에 접수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혹시 떨어지면 창피할까 봐 알리지도 못했는데, 다행히  합격이 되고 그렇게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방송대라서 혼자 공부해도 되겠지만 함께라면 정보도 나누고, 대학생활에 재미도 느껴보고자 스터디에 가입했다. 물론 상황이 비슷한 학우들과 스터디 핑계로 모여서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다. 급하면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오는 학우도 있고, 도시락을 싸와서 정자에 앉아 웃고 떠들며 먹기도 하고, 남들처럼 체육대회도 하고, 물론 대학의 꽃인  MT도 갔다. 게임도 하고, 동아리별로 장기자랑도 하고, 저녁이면 끝없는 토론에 장을 펼치며, 교수님, 학우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대학 4년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바쁘게 달리고 있었다. 통장을 하면서, 학생상담자원봉사자로서 일주일에 2번씩 집단상담수업으로 초, 중, 고 학생들을 만났다. 그리고 칠 남매에 맏며느리로서 집안대소사와 형제들을 챙기며 하루하루를 24시간이 모자란 듯이 살았다. 그래도 즐거웠다. 내가 하고 싶어서 온갖 열정을 쏟아부으며 어느것 하나 소홀함 없이 멋지게 해 나가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공부였기에 가끔 오프라인 수업에서 교수님들의 주옥같은 말씀들은 곧바로 교육 현장으로 이어지며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특히 청소년지도를 위한 일부 과목이 실기평가로 이루어지는 경우 통장일을 하면서 행사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실행함으로써 실기점수를 만점으로 채웠다. 졸업논문 또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연계하여 썼으므로 한 번에 통과될 수 있었다.




4학년이 되면서 마지막이라며 임원을 맡아주었으면 했다. 3년 동안 과대를 한 학우를 회장으로 올리고 어쩔 수 없이 맡은 직책이지만 할 일이 그렇게 많을 줄이야. 신입생 입학식부터 시작하여 각 동아리활동지원과 MT준비, 체육대회, 오프라인 수업 시에는 교수님 지원까지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래도 배운 것이 많은 한 해였다. 많은 학생들 앞에서 떨지 않고 당당하게 입학식을 진행하고. 통장총무 일을 하면서 쌓은 경력을 활용하여 MT도 체육대회도 거뜬하게 준비했다. 결국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서로 윈윈 하며 나 자신이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파티를 끝으로 사회자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4년의 짧지 않은 여정을 마무리했다.




4학년이 되자 교수님들의 특강이 이어지며 졸업 후 진로에 대해 좋은 말씀들이 쏟아졌다. 대학원까지 욕심이 났다. 4년을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작은 아이도 공부 중인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딸은 졸업도 전에 취업이 되었고, 아들은 대학원 공부를 더 했으면 좋겠다는 나의 권유에도 취업하겠다며 갈 생각이 없단다.


세상사가 모두 탄탄대로라면 굴곡진 인생이란 말이 왜 있으랴. 나 혼자만의 욕심으로 내세우기에는 명분도 이유도 부실하기만 했다. 그 나이에 대학원을 나와서 어느 세월에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것인지. 그럼에도 시간강사가 될지언정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미련에 끈을 놓지 못하는 내게 결정타가 된 것은 현재 6년째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에 정신이 흐려져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꿈꾸었던 대학교수의 꿈은 조용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그로 인해 참 많이도 우울했었다.




결국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찬란했던 대학생활은 막을 내리고, 4년의 결정체로 평생교육사.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 자격증이 내손에 들렸다. 물론 고된 실습과정과 어렵다는 자격시험, 지독한 압박면접을 이겨내고, 어린 친구들과의 합숙교육까지 끝내고서 말이다.


그럼 뭐 하나. 누가 나를 써준대나. 처음부터 어떤 일을 해보겠다고 공부를 시작한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무엇인가 배움에 결실을 맺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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