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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Jun 09. 2023

돈 냄새나는 정산소

안내데스크에서 정산소로

이사를 하고 여유 있는 틈을 타 운전면허증도 취득하고, 부녀회로 시작해서 통장일을 보게 되었지만, 어느 하나 뚜렷하게 가계에 도움 되는 일은 없었다.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한데, 소득 없이 낸다는 것이 편치만은 않았다. 더구나 아이들도 자라서 아침에 학교 갔다 저녁 늦어서야 돌아오니, 그 빈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 같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대형마트가 들어오면서 직원 모집공고가 났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초등학교 친구와 함께 으쌰! 으쌰! 하며 안내데스크에 지원했다. 그때만 해도 안내데스크에 지원하기에는 좀 나이가 있다 보니  되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데 덜컥 합격통보가 왔다.




새로 오픈한 마트에다 안내데스크이다 보니 숙지해야 될 사항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길안내부터 물건들에 위치며, 분실물에 대한 문의까지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이다. 그뿐이랴 하루에도 수 없이 밀려드는 고객들의 클레임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거기에 수시로 안내방송까지 해야 했다. 물론 이 많은 것들을 해내기 위해 이미 오픈 전에 며칠씩이나 사전교육을 받았고, 연습도 많이 했었다.


시간이 흐르며 친절한 고객응대에도 능숙해져 가고, 안내방송도 적응해 가고 있었는데 자리이동 소식이 들렸다. 다양한 안내데스크 일들임에동료들과 손발 맞추며 재미도 있어지려고 하는데 착잡했다. 지금도 가끔 그 동료들과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때의 일들로 수다 꽃을 피우느라 하루해가 모자를 지경이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여전히 안부를 전하며, 데스크 단톡방은 따스함과 정겨움으로 채워진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른 모임과 달리 유난히 애정이 가는 동료들이다. 소위 진상고객들로 인해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서로 위로하며 견뎌온 시간들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가는 동생들이다.


안내데스크에서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 같이 들어간 친구도 나보다 한 살 아래이다 보니 볼 것도 없이 최우선 대상자였다. 그러지 않아도 지원할 때부터 나이가 마음에 걸렸는데, 결국  나이 때문에 밀려나는 것 같아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고민 끝에 계산원으로 보낸다면 그만두겠다는 강수를 두었다.


몇 개월을 투자해서 교육시켰는데 예상치 못한 나의 답변이었는지 일단 시간을 갖자고 했다. 그리고 기획파트인 정산소로 발령이 났다. 나의 이력서를 보고 상과를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마침 충원해야 할 자리에 적합하다 하여 보내진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상과였지만 이렇게 덕을 보게 될 줄이야. 인생이란 정해지지 않은 여행길과도 같다.




그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별의별 고객들을 응대하며 스트레스받는 것보다는 그곳이 내 적성에 더 잘 맞을 것 같았다. 정산소는 쉽게 말해 계산원들에게 준비금이 든 가방내어주면, 고객이 결제한 금액을 플러스하여  퇴근 전에  가방을 다시 반납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날의 모든 금액을 확인하고, 컴퓨터에 입력한 금액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야만 퇴근할 수 있는 곳이다.  


어찌 보면 그곳에서 높은 매출액이 숫자로 찍혀야만 마트가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정산소는 계산원의 대기실 안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말 작은 공간에 대형금고 한대와 계수기와 컴퓨터, 라디오 한대가 전부였다. 오히려 넓지 않아서 외부인 출입금지로 혼자 조용히 라디오를 들으며, 가끔은 사연도 신청해 보며  작은 공간에서 라디오와 친구가 되었다.


그 시절에는 모든 마트들이 12시까지 영업을 했었다. 계산원들이 그날에 매출을 모두 반납하고 가면 그때서야 정산에 들어간다. 빨라도 20~30분은 걸리는데 가끔은 금액이 맞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새벽까지 다시 동전까지 몽땅 꺼내 확인하고, 컴퓨터에 입력된 금액까지 일일이 확인하느라 퇴근 늦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견딜만했다. 세상에 누가 공짜로 돈을 주겠나.




억지로 누가 하라고 했으면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해보니 나쁘지 않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라디오를 벗 삼아 만 3년을 다녔다. 작지만 아늑한 내 공간에서 비록 돈 냄새만 맡으며 내 것이 아닌 억대의 돈도 만져보며,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지려나 궁금해하며, 나 만의 사유에 시간들이 주어짐에 감사하기도 했다.


그사이 딸아이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면서 집을 떠나 기숙사로 들어가고, 아들도 대학에 들어가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하다 보니 밤늦게까지 하는 날이 버거워져 갔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모두 나에 소망대로 진학한 것이 너무 감사했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도움 되는 일을 열렬히 하고 싶어졌다.


마침 그만두기 전에 지인의 소개로 학생상담자원봉사자에 대해 알게 되어 지원을 했고. 다행히 선정이 되어 활동하게 되면서 기쁜  마음을 안고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살아온 길돌아보았을 때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또 다른 경험을 해보며 가계에 보탬이 되면서 내 일을 했다는 것이 뿌듯한 시간이었다. 또한 지금 이렇게 추억하며 글로 남길 수 있음에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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