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새해맞이 사랑의 떡국나누기" 잔칫날이다. 통장협의회 주관아래 진행되는 행사로,관내 독거노인을 모시고 떡국을 대접하기로 했다. 방송국에서 촬영도 온다 하니 더 신경이 쓰인다. 두어 달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정하고, 연습을 했다. 어제는 하루종일 사골을 끓이며 고기도 삶아서 준비했다. 당일 아침에는 떡국은 물론이고 떡과 과일, 김치와 회무침등등 식사준비도 완벽하게 끝냈다.
동사무소에서 정해주는 대로 해도 되건만 이번에는 오지라퍼인 내가 처음부터 통장님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통장님의 기타 연주와 노래, 에어로빅, 어르신들께서 좋아하실만한노래도 여러 곡 준비하고, 벨리댄스 등등 어설퍼도 우리들이 만든 무대로 선보였다.
드디어 행사시작 5분 전 일하다 말고 정장으로 갈아입고 사회를보며, 수시로 음식량 체크도 하고 무대순서도 확인하면서급하면 떡국쟁반을들고뛰기도했다. 무슨 열정으로 그런 일들을 했었는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난다. 하루아침에 그런 노하우가 생길 리가 있나. 그때는 벌써 통장총무를 한 지 7~8년 차였을 것이다.
이사를 하고 몇 날 며칠 정리를 하느라 바쁜 날들이었다. 초인종도 아니고 누군가 똑! 똑! 똑! 노크를 했다. 관리소장과 여직원이라며 부녀회를 해달라는 부탁이다.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어쩌자고 남편이 이사 와서 아는 사람도 없는데 해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발단은 거기서부터였다. 그렇게 시작한 부녀회였지만나와는 맞지 않았다. 서로 다른 아줌마들이 모이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마침 그런 일들에 휩쓸리기 싫어 그만두려던 차에 같은 동에 살고 있는 통장님의추천으로 얼결에 통장이 되었다.
첫 번째 통장월례회에 갔다.
아하~~~
서류를 제출하고 동장실에 갔었다. 그때 어찌나 반갑게 맞아주시는지 통장이 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내가 나이가 제일 어렸다. 연배 있으신 통장님들 속에 아담하고 곱상한 데다 똘똘해 보이는 여성통장이 왔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있으랴.
자화자찬이 너무 심했나. ㅎ
가끔은 그 맛에 살기도.
그렇게 시작한 통장은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통장님들이 하는 일은 예전에는 한 달에 두 번 월례회 참석과 입학통지서와 민방위훈련통지서를 해당 가정에 전달하는 일등을 했다. 입학통지서를 드리면 감격해서 목이 메이는 분도있었고, 돌아서는 순간 쏟아지는 환호소리에 미소가 번지곤 했다.
하지만 전입세대를 직접 방문하여 확인하거나, 전 세대를 일일이 방문하여 거주자확인을 한 다음 사인을 받는 일은 부재중이면 여러 번 방문해야 해서 힘들었다.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시시때때로 각종 행사에 동원되어 뜨거운 태양아래 서있기도 하고, 딱딱한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 있어야 하기도 했다.
통장협의회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무척 다양하고 재미있었다. 봄이면 어르신공경잔치를 했다. 어르신들께서 드실 음식을 대접하며, 함께 어울려 놀아드리기도했다. 봄, 가을로 갔던 단합대회도 오래도록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멀리 떠나고 없지만,총무를 맡고 있던 통장님이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총무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통장을 만 10년했다.
아파트나 주택단지를 대표해서 나오신 통장님들이기에 늘 문제를 제기했고. 해결하고 중재할 일들이 많았다. 성격이 강하신 분들도 있으셨기에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별의별 일들을 다 겪었다. 애써 하지 않아도 될 마음고생도 하며 뭐가 아쉬워 이 짓을 하고 있나 싶기도 했었다. 그래도 항상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고 총무를 믿고 따라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며칠 전에 우연히 함께 했던 통장님을 길에서 만났다.여전히 "우리 총무님 최고" 였다고 쌍따봉을 날려주는데 눈물이 날뻔했다.벌써 십여 년이 지난 일이건만 아직도 나를 그렇게 기억해 주심에, 그래도 조금은 잘 살아온 인생이구나 싶었다. 삶이란 것이 결국 하나하나의 파편들이 모여 추억이 되고, 때로는 그 추억들을 돌아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어 참 감사하다는생각이 든다.
늘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재미있고 보람된 일들이 더 많았다. 그 시기에 통장임기가 6년으로 정해지기도 했지만,새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만두었다. 내가 좋아서 한 일들이지만 상도 많이 받았고, 돌아보면 그때는 나름 젊었고, 건강했고, 열정이 넘쳐났고, 내 인생의황금기였다.
다른 일들을 병행하면서 치열하게 시간을 쪼개어 가며 했던 통장 10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수없이 만났다. 어디 가서 그런 경험을 하겠나. 그런 중에도마트근무를 했고. 상담자원봉사자를 했고, 대학공부를 했고, 상담교사를 했고, 아이들 결혼까지시켰다.가족들의 배려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남편은 본인이등 떠민 것이 발단이 되었기에 말릴 수도 없고, 늘 바쁜 아내 때문에 속을 많이태우기도 했다, 그래도 꼭 식사준비는 챙기려고 노력했고, 회식자리가 길어지면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시어머니께서도 건강하셨고, 내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만둔 지 꽤되었지만 우리 가족들에게 특히 남편에게 가장 고마운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