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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y 26. 2023

꿈에 그리던 아파트로

 마음의 이사도 함께 했다

이삿날 10여 년 이상을 함께 한 골목길 이웃들이 배웅을 나와주었다. 아이들이 비슷한 또래이다 보니 격의 없이 지내던 진이엄마, 인이엄마, 주연엄마 등등 너무 고마운 이웃이었다. 헤어지는 것이 너무 아쉬워 떡을 푸짐하게 해서 정다웠던 이웃들에게 나누어 드리며 감사인사를 드렸다.


아이들은 언제나 형제자매인양 잘 어울리며 놀았고, 엄마들은 우리 집 주방에서 삶의 희로애락을 풀어내며 차를 마시곤 했다. 지금도 가끔 그런 날들이 그리워지면 전화통화를 한다. 그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집안 속속들이 서로의 사정들을 공유하며, 골목길에서 피어오르던 사연들은 나를 울고 웃게 했다. 한 푼 없이 시작한 지 15년 만에 내 할 일을 다하고, 온갖 사연들을 곳에 묻어두고, 헤어짐의 아쉬움에 눈물을 뿌리며 이사를 왔다.




둘째 시동생 결혼식을 집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멀지 않은 곳에서 했다. 그 시절에는 기본으로 나오는 잔치국수만 식장 측에서 제공하고, 나머지 음식은 집에서 준비해 가는 시스템이 있었다. 몇백 명이 먹을 불고기를 재우고. 아삭한 과일샐러드, 맛깔난 김치, 군침 도는 오징어회무침 등등 이 모든 음식들을 해서 식장으로 날랐다.


어린 날에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식이 없던 둘째 작은아버지댁으로 양자를 가야 했던 안쓰러운 시동생이다.  지금도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물으면 그냥 웃음으로만 답하니 더 마음이 짠해오곤 한다. 나보다 나이는 위이지만 언제나 깍듯하게 말없이 잘 챙겨줘 항상 고마운 시동생이다.




셋째 시동생이 상견례를 한다고 했다. 형수인데 추레하게 갈 순 없어 결혼식 때 입었던 정장을 말끔하게 손질해 놓았었다. 당일날 갑자기 신우님들이 들이닥쳤다. 가타부타 말없이 나를 쏙 빼고, 시어머니와 위에 신우님 두 분 그리고 남편과 둘째 시동생이 갔다.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형수지만 남의 식구였다.


결혼당시에는 공수부대 복무 중으로 늠름하게 군복을 차려입고 짧은 휴가를 나왔었다. 그래서 자주 집안소식을 전할 겸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때는 형편이 그다지 좋은 때가 아니었다.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축하한다고 편지 속에 현금을 보내주더니, 전역하면서 내게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위험한 점프를 해서 받은 수당을 모아서 가져다 준걸 생각하면 지금도 코끝이 찡해온다.




지금도 일주일이 멀다 하고 안부전화를 하는 막내시동생이다. 시집올 때 중2였는데 가끔은 자식처럼 나를 애먹이곤 했지만 미워할 수 없는 도련님이었다. 어쩌다 학교에서 늦게 돌아온 날 기껏 밥상을 차려다 주면 라면을 먹겠다고 다시 차려오라고 해서 나를 열받게 했다. 으이구 저 쪼맨한 것이 지가 도련님이라고 형수를 부려먹곤 했다. 그뿐인가 내가 아이들 동화책을 큰맘 먹고 월부로 샀더니 비싼 걸 세트로 샀다고 생난리를 쳤다. 지가 뭔데, 책값 줄 것도 아니면서.


아침이면 일어나서 얼른 씻고 출근하라고 시어머니께서 그렇게 사정해도 일어나지 않다가 갈 시간이 코앞이 되어서야 일어나서는, 늦었다고 학교 가려고 씻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끄집어내고 지가 씻었다. 그랬던 막내가 결혼을 하면서 우리에의 할 일은 모두 끝이 났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하니 웃음이 나고 10년 이상을 한집에서 같이 지지고 볶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기에, 지금도 부모인양 늘 마음 써주어 기특하고 고맙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시동생 학비까지 대며 키운 보람이 있다.




남편과는 시동생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홀가분하게 이사를 가기로 약속했었다. 드디어 막내시동생이 결혼날짜를 잡았을 때쯤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분양받은 아파트 건물이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건축현장을 바라보며 설레고, 흐뭇하고, 그 감격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길 건너 한강뷰에 사는 엄마들에게 겉으로는 어디나 사는 건 다 똑같은데 하면서도 내심 부러웠었다. 하지만 불어나통장의 잔고를 보며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우리가 아파트 분양을 받아서 간다 하니 주위에서 모두 깜짝 놀랐다. 늘 동동거리고 살면서 언제 그런 돈을 모았는지 그들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복병이 나타나셨다.

단 한 번도 큰소리 낸 적 없이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았건만 이사문제로 마음에 틈이 생겼다. 시어머니께서는 당신 손때 묻은 온갖 물건들을 가지고 가야 한다고 하시고, 나는 더 이상 둘 곳이 없어 버리고 가야 한다며 갈등이 생겼다. 예를 들면 항아리, 큰 소쿠리, 대형대야, 왕솥단지 등등. 두 사람의 문제가 급기야는 시누이들 귀에 들어가고 곱지 않은 소리들이 메아리처럼 내게 들려왔다. 할 수 없이 일부를 끌고 이사를 왔지만 더 이상 쌓아 놓을 곳이 없어 결국 다시 버려야 했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겪으며 정들었던 골목길과 매일같이 쓸고 닦으며 살았던 나의 기쁨과 눈물이 함께 했던 집을 떠나왔다. 늘 시어머니 살림에 발만 담근 거 같아 편치 않았는데. 이사하며 새로 장만한 내 살림이라는 것이 더없이 좋았다. 더 이상 내손으로 챙겨야 할 시동생도 없고, 오직 내 아이들만 돌보면 되기에 홀가분하게 마음의 이사도 함께 했다. 




열심히 살아왔기에 누구의 도움 일도 없이 혼자 힘으로 집을 샀다. 장맛비가 수없이 내려도 비 샐 걱정 안 하고 아이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게 된 것은 좋았지만, 전학문제에서 미안함을 가져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식 가르치겠다고 서울로 이사 오는 판국에, 우리는 지방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니 할 말은 없으나, 어디를 가든 본인 할 나름으로 내가 좀 더 아이들에게 마음 쓰리라 다짐했다. 오히려 남편의 직장은 가까워져 출퇴근으로 인한 피곤함에서 벗어났고, 나 또한 새벽밥에서 해방되었다. 다행히 아이들도 잘 자라줘서 다시 서울로 대학을 갔고, 그 후 한번 더 이사를 했더니, 청소도 힘들고 이제 다시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


집이란 것이 때때로 사람을 울고 웃게 만든다.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따스하게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오손도손 사랑을 나누며, 꿈꾸던 그런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제발 헛꿈 꾸며 한방에 연연하지 말고, 한 푼이라도 열심히 모아서 저축하자. 몸에 좋지도 않은 비싼 음식 자주 시켜 먹지 고, 돌고 도는 유행 따라 입지도 않을 옷을 사서 쌓아두지 말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나가다 보면 내가 원하던 집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하루아침에 집사는 사람, 부모님 도움이면 몰라도 힘든 세상이다. 집값도 어마어마하게 올라 쉽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사는 사람 있다.  남들과 똑같이 사고, 똑같이 먹고 싶은 거 먹고살면 집사기는 요원하다. 독하게  덜 사고 덜 먹으며 악착같이 모아서 보란 듯이 집사기 성공을 응원해 본다.  남도 사는데 내가 못 살 이유 없다.  


사진 출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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