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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y 21. 2023

돈을 벌기 시작했다

별것 아니어도 멈추지 않는 도전

말수도 적고 좀처럼 자신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며, 본인 일만 묵묵히 할 줄 알았던 아가씨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면서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어른들 앞에서는 상냥하고 싹싹한 새댁에 수다스러운 엄마가 되어갔다. 살아가야 한다는 본능에 충실하며, 보호색인양 나를 꿰맞추며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새벽같이 출근하는 남편 아침밥을 차려주고, 밤새 내어 놓은 기저귀들을 빨래판에 박박 문질러 빨았다. 햇살 좋은 장독대 빨랫줄에 널어 두고는 부지런히 뜨개질을 다. 며칠 전부터 식탁보 둘레를 레이스실로 예쁘게 떠주는 일을 했다. 꽤 넓은 둘레를 돌아가며 다 떠주어야 하기 때문에, 자잘한 구슬을 꿰는 것보다는 단가도 사랑스러웠다.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우리 아가들 과잣값으로는 충분했다.




아이들이 좀 더 크고 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크리스마스 볼이나 장식품들을 만드는 일을 하러 가정집으로 갔다. 물론 처음에는 동그란 공을 몇 자루씩 가져다가 틈틈이 반짝이는 금색, 은색비닐로 감아주는 일을 했다. 그러다 요령이 생기고 기술이 습득되어 가내수공업으로 운영되고 있는 집으로 출근했다.


각 집에서 모아 온 공들을 트리에 걸 수 있도록 고리를 붙여서 포장하여 완성품으로 만들고, 각종 장식품들도 만들었다. 접착제를 녹여서 하는 일이라  냄새 때문에 괴로웠지만 남의 돈 먹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대부분이 어르신들 이기에 그분들에 고단했던 인생살이도 새참으로 들으며, 큰 힘이 들지 않는 일이라 재미있었다.




아들까지 유치원에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고 싶었다. 마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오픈한 빵집에서 알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알바를 시작한 지 며칠 만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빵을 굽던 직원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그만두는 바람에 졸지에 빵집기사가 되었다. 지금은 아쉽게도 사라진 브랜드 빵집이지만 결혼 후 처음으로 월급 받으며 일했던 곳이라서 어쩌다 이름을 들으면 아련함으로 다가온다.


빵집 사장님은 우리 집과 불과 몇 정거장 차이에 있는 강남의 부잣집 사모님이었다. 그 시절에 이미 눈도 코도 그분 본래의 모습은 아니었으나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에 비해 남편 분은 사업을 하시는 건장한 분으로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가정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사장님은 왜 걸핏하면 남편 험담을 하고 박 터지게 싸우면서 밤 12시까지 빵집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알바 자리에 사장님 친구분이 오셨는데 참 좋은 분이셨다. 성격도 밝으시고 총명하시고 사장님과는 대조적인 분위기에 정이 많은 분이셨다. 그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아이들 학원비가 밀렸다고 빵집으로 전화가 오곤 했다. 친구분 말씀은 더 황당했다.


사장님께서는 금고 가득 신권으로 채워놓고 살면서 학원비는 아까워서 제때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자인 사람은 다 그런 건가. 하기사 내가 1년이나 다니고 그만둘 때 당연히 퇴직금을 주어야 하는데, 남한산성까지 끌고 가서 닭볶음탕 한 그릇으로 때우신 분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처음에는 집도 가깝고 기술도 배웠으니 오래 다닐 생각이었다. 알바가 먼저 나와서 본사에서 나오는 봉지 빵을 받으며 오픈을 해 놓으면 나는 오전 10시쯤 출근해서 빵을 구웠다. 나의 요구조건에 따라 오후에는 그날 팔 수 있는 양의 빵만 구워 놓고, 아이들이 하원하는 4시에 퇴근하면서 장을 봐다가 저녁을 해 먹었다.  


누구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식구들이 보기에는 시어머니를 애 보는 사람으로 취급한다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결혼한 여자가 일을 한다는 것에 곱지 않은 시선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결국 1년 만에 결혼 후 첫 직장인 빵집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렇다고 마냥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1년 동안 돈맛을 보았으니 눈치를 보다가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작은 슈퍼에서 오전에만 요구르트를 진열하는 일을 했다. 겨우 달 반 인가 했는데 그때 00 물산에서 파트타임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면서 일할 기회를 얻어 그만두고 옮기게 되었다.


오후 2~8시까지라서 저녁시간이 걸렸지만 우리 아이들도 많이 자랐고, 마침 시동생 라인을 타고 시작한 일이라서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다. 한마디로 재미있었다. 특히 식당에서 제공해 주는 저녁은 어찌나 맛있던지 역시 남이 해주는 아니 대기업에서 주는 밥이라서 그랬나 가장 맛있게 먹은 밥으로 기억된다.


본사건물에서 신입교육도 야무지게 받고 00 맨으로 애사심 가득 무장하고 시작한 판매직은 내가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상금이 걸린 이벤트에서 최고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명동 한복판에서 나름 품위 있어 보이는 정장들을 팔고 있었지만 소위 진상손님도 있었고, 단골이 되어 내 직업에 보람을 느끼게 해 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압구정동으로 근무지가 바뀌면서 협찬 때문에 만났던 연예인들을 티브이에서 가끔 본다. 하루는 신인 배우인 거 같은데 본사에서 협찬을 받아 매장에 왔지만 워낙 팔다리가 길어서 맞는 옷이 없었다. 어찌나 성질을 부려대는지 본인 팔다리가 긴 것을 날 보고 어쩌라는 건지. 그래도 잘 나가는 중견배우가 된 그 배우를 늘 응원해 준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만져만 보고 가는 한때는 유명했던 연예인도 여럿 보았다. 사람 사는 게 마냥 평탄치만 않은 것이 인생사인 것 같았다. 그즈음 열심히 모은 돈으로 남편직장이 가까운 곳으로 꿈에 그리던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하게 되면서 1부 돈 버는 일은 막을 내렸다.




가족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응원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여전히 눈치를 봐가며 많지도 않은 돈을 벌러 다녔었다. 돈을 벌어서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잘 가르치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과, 나의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공존했다. 가끔은 신문에 난 무료 강의 일정을 확인하고, 고상한 척 혼자 버스를 타고 가서 듣고 오기도 했다. 뭔 말인지 몰라도 가서 들었다.


어찌 보면 하찮아 보일 수도 있고, 벌이도 안 되는 일을 낸들 하고 싶었을까. 결혼 전에 하던 경리일을 찾아보려 했지만 그 시절에는 기혼자를 경리로 채용하려는 곳도 드물었고, 살림하고 아이들 때문에 풀타임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밥하고 빨래만 하며 내 인생을 무의미하게 채우고 싶진 않았다. 상황에 맞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했다. 


남편 월급은 여전히 저축하고 생활비로 쓰면서, 내가 번 돈은 적은 금액이지만 고스란히 차곡차곡 모으는 재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었다. 대단한 자격증도, 번듯한 간판도 없는 내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나에 대한 사랑이고 세상을 향한 작은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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