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야 May 18. 2023

스스로 걸어간 결혼의 덫

다름은 눈물로 채워지고.

결혼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그 남자의 민낯을 보고 말았다. 이미 멀리 와버렸다. 식장을 예약했고, 청첩장은 모두에게 전달되었을 것이고, 내 마음만 슬픔의 덫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되돌릴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데 날짜는 속절없이 가고 있었다.


예식을 앞둔 어느 날 예비신랑과 예비신부가 만났다. 서로는 결혼이 처음인지라 이미 준비과정에서 각자의 입장에서 많이 지치고 고단했다. 그렇다고 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 살아서 하는 결혼도 아니고, 애틋한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랑이 샘솟는 연인도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마음에 각을 세우고 말았다.

 

지나고 보니 별것도 아닌 혼수문제로  양가의 기준이 다르다 보니 전해야 하는 신랑은 답답했고, 들어야 하는 신부는 서운했다. 그 내용이야 어떻든 간에 머리를 맞대고 합리적으로 적당한 선에서 조율을 해나가도 모자랄 판에 그는 예고도 없이 불같이 화를 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 남자의 모습이 너무 무서웠고, 당황스러웠고 , 놀랍고. 절망을 했고, 눈물만 흘렸다. 가장 행복하고 빛나야 할 이 순간이 내 인생에 가장 불행한 시간인 것만 같았다.


많이 아팠다. 온화했던 그 얼굴에서 그렇게 확 달라진 표정으로 언성을 높이던 그 모습이 나를 수렁으로 깊이깊이 빠져들게 했다. 나의 몸무게는 최저점을 찍어갔다. 결혼식은 내일인데 열이 나고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늘어진 몸을 끌고 병원에 갔다. 일단 약을 먹고 약에 취해 죽은 듯이 잤다. 이미 나의 선택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그 누구 탓도 할 수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진료 전인 병원의 배려로 링거를 맞고 예식장으로 다.


그날의 슬픔이 묻어있는 턱이 뾰족한 얼굴!


지금도 결혼식 사진을 보면 턱이 뾰족한 얼굴에 나만이 알고 있는 그날의 슬픔이 잔뜩 묻어있다. 안쓰러운 그때의 그 여자를 떠올리며 히죽이 웃어본다.

지금에서야 너의 선택이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고.




모든 것이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순간의 실수였다고. 나에게 그런 행운은 오지 않았다. 어디 마실이라도 갔는지 먼 여행이라도 떠났는지 외로움만이 끝없이 깊어질 뿐이었다. 혼자여서 외로움보다도 둘이어서 밀려드는 외로움과 서글픔은 더 큰 아픔이 되었다. 설거지를 하며 쏟아지는 수돗물 소리에 묻혀 흐느낌으로 채워지는 신혼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는 그를 이해하고 보듬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직 나만 들여다 봐주고 나만 바라봐 주기를 원했다. 남편은 시아버지께서 예고도 없이 가시는 바람에 황망한 마음으로 상을 치른 지 6개월 만에 한 결혼이었다. 물론 지병으로 고생은 하셨지만 그렇게 하루아침에 집안에 가장이 되고, 어머니, 동생들까지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으랴. 


설상가상으로 시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여기저기 빚보증을 서신 탓에 상중에 달랑 있는 집이 경매에 어갈 판이었단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들을 찾아가 젊은 날에 혈기왕성했던 자존심은 묻어버리고,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사정을 해서 합의를 보았단다. 그 모든 걸 해결하기 위해 혼자서 이리저리 뛰었을 생각을 하면 장남에 무게가 그리도 처절해야만 했나 싶어 마음이 아려온다. 


시아버지 유품 중에는 각종 증서와 어음 등 서류들이 많이 있었지만 사자는 말이 없고, 산자들은 한결같이 모르는 일이라 발뺌을 해대니 결국 단 한 푼도 건지지 못한 채 빈손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있는 돈 없는 돈 끌어 모아 집을 지켜냈지만 그 세상이, 앞에 놓인 현실이 곱지만은 않았을 터이다. 황량한 들판 매서운 찬바람 앞에 홀로 선 듯 그 또한 외롭고, 서러웠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먼 훗날 그때의 아픔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게 들려주던 순간, 가슴으로 흘리는 눈물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장남라는 이유로 홀로 모든 것들을 감내하고 지켜내야 했던 그를 백 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들을 전혀 몰랐던 나는 낯선 날 선 그 언성에 매몰되어 땅속 깊은 낭떠러지로 끝없이 추락할 뿐이었다. 그 과정 속에는 호적에 시어머니가 내가 알고 있는 그 시어머니가 아니었다는 것이 화근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본인이 선택할 수 없다는 합리적인 이유를 댄다 해도 최소한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나를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버리곤 했다.


그 시절에 그럴 수 있지,

유난 떨며 따지는 거냐고.


그래 그런 큰 시련도 넘긴 사람이니 그런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 모든 일들 역시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단지 이 집에 애 낳고 빨래만 하러 온 거였나 싶어 이미 생채기 투성이인 나에게 스스로 물을 뿌려대곤 했다. 어디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갈필을 잡을 수가 없었다. 희망이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앞집에 사시는 통장님께서 요즘 집집마다 쥐들이 극성인데 동사무소에서 주는 거라며 조심스럽게 건네주셨다. 무슨 생각에 버리지 않고 꼭꼭 싸서 나만이 알고 있는 장소에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도록 숨겨두었다. 가끔 일기를 썼다. 삶이 고단하다고, 이렇게 살려고 선택한 결혼이 아니었다고. 어쩌면 이 생을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저것을 ***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시간이 지나고 눈물이 마르지 않던 그 시절, 일기장이 남편손에 들려 있었다. 그날밤 나를 진심으로 아주아주 진심으로 꼭 끌어안아 주었다.


사진출처  이미지

이전 08화 멈추었던 나의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