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는 당신은 간신히 소학교만 나오셨지만 막냇동생만큼은 고등학교까지 가르치기 위해 남의 집머슴일까지 하셨다. 그렇게 가르친 막냇동생집에 취업에 실패한 나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갈 수밖에 없었다.
말이 사업이지 작은 사무실에 책상 몇 개에 활자들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타자기 몇 대뿐인 인쇄소였다. 일반타자기와는 전혀 다르므로 익히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5년 동안 한일은 경리 겸 타자수로거래처 전화를 받고, 연구소에서 의뢰하는 보고서나, 한글로 써온 석. 박사 논문을 한문으로 변환하여 타이핑을 해주는 일이었다.
이미 실패로 인한 상처로 별다른 희망도 계획도 없었기에 기계처럼 평일, 휴일 없이 출근을 했다. 그리고 일이 많으면 언제든지 야근을 했다. 그리고 걷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종로바닥을, 을지로바닥을, 명동거리를 참 많이도 헤매고 다녔다. 어차피 이곳 아니면 갈 곳도 없고, 20대의 젊은 날에 꿈도꾸지 않았으니 내게는 멈춤에 시간들이었다. 그런 시간들마저도 적응해 나가려고 애썼지만 그도 쉽지 않았는지 무작정 집에 가고 싶은 날이 있었다.
새벽에 대충 짐을 꾸려 아무 말 없이 기차를 타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갑작스럽게 내려온 딸에게 아버지께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나도 그냥 아무 말없이 며칠을 보냈다.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떠난 그 집은 이미 내 집이 아니었고 낯설기만 했다. 내가 편히 쉴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아버지를 따라 말없이서울로 올라왔다.
내가 이곳 생활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결혼뿐이었다. 그러나 나에 연애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결혼까지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결혼이 탈출구일지라도 만나자마자 당장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예의 없는 사람과 할 순 없었고, 분명히 좋은 사람인건 알겠는데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정이 가지 않는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 사람과 이별을 했다. 많이 미안했다. 무척이나 나를 좋아해 줬고, 바라보는 것도 아까워했던 사람이었지만 인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1월 2일 맞선을 보았다. 깔끔한 외모에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작은집과 잘 알고 지내온 사이이기에 어렵지 않게 결혼이 진행되었다. 우선 사업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괜찮았고, 꼬박꼬박 월급이 보장된 사람이라서 믿음이 갔다.
그럼 남편은 나와 왜 결혼을 했을까? 내가 착해 보여서란다. 바보처럼 착하기만 했던 내가 남편에게 제대로 걸려든 것이다. 남편은 그 당시 7남매의장남이면서가장으로서 부양해야 할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었기에 결코 좋은 결혼조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시집살이가 뭔지도 모르고 뭐에 홀려서 그렇게 몇 번이나 만났을까, 같은 해 4월 결혼을 했다. 만난 지 4개월도 안되어서.헐~~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다른 삶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5년 동안 웅크리고 앉아 타인을 위한 시간들을 보냈지만, 결혼하면서 내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들이내게주어진 것이다. 나는 그 시간들을 찾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 거였다.성실한 남편은 그런나의 결심에 기꺼이 함께 해준 동반자이고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