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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Apr 30. 2023

취업실패의 쓴맛

왜 그러셨을까?

1학년때는 기숙사 생활을 했었다. 일은 고단했지만 언니, 친구들과 다 같은 입장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견딜만했다. 한 달에 단돈 얼마라도 저축하면서 교복을 입고, 갈래머리를 따고,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 다니는 것도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형편없는 식단이었지만 그때는 가난한 우리 집에서 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렇게 계속 기숙사 생활을 했더라면 난 결코 그 시간들이 힘든 기억만으로 남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촌여동생이 오고 나서 월세방을 얻어서 나가야 했다. 사촌여동생이 기숙사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너무 힘들어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내 월급으로 저축까지 하며 충분히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남동생과 사촌남동생까지 오면서 더 넓은 집으로 옮겨야 했다. 


나는 모으고 있던 적금을 깨서 전셋돈 절반인 30만 원을 준비하고 나머지는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한 푼도 모으지 못한 사촌여동생은 작은아버지께서 30만 원을 가지고 오셔서 60만 원짜리 전셋집을 얻어 시작했었다. 그 후론 저축은커녕  남동생 학비를 내고 나면 생활비도 부족해서 쩔쩔매다 보니 친구에게 빌려 쓰고 월급 타면 갚기 바빴다.


내가 졸업을 하고, 취업에 실패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내가 마련했던 그 전세돈은 어디로 갔을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서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리고 3년 동안 고생한 퇴직금을 받았는데 그때는 살림밑천이었던 송아지사고 싶다 하셔서 고스란히 아버지께 가져다 드렸었다. 하지만 훗날 그 소는 오빠 결혼자금으로 썼다는 것을 먼 훗날 알게 되었을 뿐이다.




서울로 올라온 나는 5년 동안 가족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월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 겨우 차비에 약간의 용돈을 받았을 뿐이다. 결혼할 때 혼수를 해주겠다는 명목이었지만 내게 해준 혼수는 반자동 세탁기에 냉장고, 티브이, 그릇세트가 전부였다. 장롱과 차단스, 화장는 아버지께서 해주셨고, 이불은 엄마가 목화솜을 따서 직접 만들어 주셨다.


결혼식날 그 말만은 듣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께 절대 희야에게 돈을 한 푼도 주지 말라고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이제 출가외인이라서...

꼭 그랬어야만 했을까?

사무실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을지라도 그것이 내 탓도 아니요. 내 친구들이 준 축하금마저도 한 푼 받지 못하고 오직 시집어른들로부터 받은 절값만을 들고 신혼여행을 떠나야 했다. 서럽고 비참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후회도 없고 서운함도 없다. 나의 취업실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고, 밥은 굶지 않고 서울생활을 했으며, 덕분에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했으니 감사할 일이다. 가끔 외로운 타지에서 5년 동안 함께 산 정으로 이미 연로하신 분들을 뵈면 그저 반갑게 손을 잡아드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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