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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Apr 28. 2023

유품을 정리하며

부기합격증

엄마가 떠나신 후 유품을 정리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정리를 했었지만, 아버지물건이면서도 엄마물건이어서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양의 물건들을 한꺼번에 정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급한 일정으로 다 하지 못하고 먼저 집으로 왔었다.


얼마 후 조카(언니딸)에게서 톡이 왔다.


어 이게 뭐지,

어디서 본듯한데?


이게 도대체 언제 적 물건인디. 

어디서 나왔을까?

반가운 마음에 톡을 보냈다.


이걸 어디서 났니?

나에게는 이거 엄청 의미 있는 건데.

공부가 부족한 부설학교에서 우리 반에서 나 혼자만 시험에 합격해 선생님께서좋아하시, 우리 아버지께서 엄청 좋아하셨었어 ㅎ

그런데 아버지께서 면사무소에 신고해야 한다고 해서 시골에 가져다 드린 거였어. 아마도 잘은 모르지만 그때는 만약 전시가 되면 차출목적이었다는 썰이 있었어 ㅎ

고맙다 추억소환 ㅋㅋ 


그리고 전화가 왔다.


이모!

그거 작은방에 있는 외할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서랍에서 나왔는데 아마도 외할아버지께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셨던 거 같아요. 이모한테도 의미가 있을 거 같아서 엄마한테 맡겨 놓을 테니 챙겨가세요.




지금 생각하면 겨우 부기 3급 합격에 부끄럽게 그 요란이었을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겨우 4교시밖에 할 수 없는 부설실업고등학교였으니 말이다.


솜먼지를 뒤집어쓰고 기계소음에 시달리며, 불량이 나면 조장에 고함을 들으며 퇴근과 동시에 달리기가 시작된다. 재빨리 씻고 교복으로 갈아입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긴 머리를 꾹꾹 짜내고 갈래머리로 땋으며 식당에서 밥 한 숟갈 먹다가 시간이 촉박하면 그도 포기하고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새벽부터, 또는 밤새워 공장에서 일하고 온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가 되었을까. 감겨오는 눈을 비비며 아무리 용을 써대도 칠판에 쓰인 글씨가 흐릿해지며 춤을 추다가 어느새 고요함이 찾아오고 숙면의 길로 가고야 만다. 그래도 이 학교에 룰처럼  선생님도 짝꿍도 그 어느 누구도 잠든 친구를 깨우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수업시간을 숙면으로 채우고, 쉬는 시간이 되면 여느 여고생들처럼 웃고 떠들며 난리도 아니다. 오늘 작업시간에 불량이 나서 조장에게 엄청 깨졌다는 둥 주말에 잔업에 걸려 속상하다는 둥 일터에 관한 수다로 하루의 고단함을 날려버리곤 했다.




시험 때가 되면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은 유난히 길어졌다. 공부한다고 잠 못 자면 현장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니 절대 무리해서 시험공부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 시험조차 볼 수 없었던 우리 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단 한 번, 우리 학교에서 시험을 볼 수 있었고 그때 합격했었다.


아직도 그것이 아버지 귀중품이 보관되는 서랍에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집을 몇 번이나 헐어내고 짓고 했는데도 버리지 않으셨다니 새삼 부모님이 더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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