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에 이성 간에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아련한 추억이 없다면 조금은아쉽지 않을까 싶다.하물며 남녀공학인 우리 학교에서 말이다. 입학하고 기숙사에 살면서 7 공주가 유행이던 그때 우리들도 7명이모여 의리팀을 결성했다.
적게나마 월급을 받으니 부모님께 아쉬운 소리 할 필요없는우리는짬만 나면 모여서 떡볶이도 먹고. 같은 날 휴무를 잡아서 새벽기차를 타고 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그곳에서 여학생들만 온 팀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산자락에서 교련복을 입은 남학생들과제목도 모르는 팝송에 빠져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참 순수했던 시절이다.
그리고 2학년1학기친구에 주선으로 1년 선배 오빠들과 미팅이 이루어졌다. 물론 선생님들께 들킬세라 휴일에 문이 열려 있는 빈교실을 찾아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스릴 있고 재미있었다. 그때 나와 짝이 된 선배는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말이 없는 착한 친구였다.
우리들의 아지트는 내가 좋아하는 옥상이었다. 휴일에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마냥 빈 교정을 바라보며 무슨 말들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지금은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친구. 나란히 저녁노을이 물드는 교정을 지나 늘 자전거 뒤에 나를 태워서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곤 했었다.
그렇게 그림같이 아름답고 순수한 시간들이 쌓여갔다. 결국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핑계가 되고 만다.ㅎ 한 학기 만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끔은 14명이 만나 웃고 떠들며 공장생활에 고단함쯤은 깡그리 날려 보내며 고교시절 한 자락의추억도 만들었다.
어느 주말 나는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 빵집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빵집을 들어서는 국어선생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고개를 푹 구겨 넣으며 뛰쳐나왔다. 그 시절엔 빵집출입이 교칙에 위반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학교 계단중간에서 국어선생님과 딱마주쳤다. 나름 모범생이었던 내가 무슨 변명을 하겠나. 고개도 들지 못하는 내게 국어선생님은 딱 한마디 하셨다.
"희야, 너를 믿는다!"
이래저래 그 만남은오래가지 못했다. 오빠들이 3학년 2학기가 되면서 각자 공장으로 실습을 떠났기 때문이다. 물론 계속 시간 내서 만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국어선생님의 믿음을 지켜야 했다. 결국 다른 오빠들에게 매정하다고, 그 친구가 나로 인해 많이 힘들어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그 친구에게 소아마비가 왔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때 동생들과 함께 살아내느라 힘에 겨웠기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풍문으로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머리가 띵! 하고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 오빠들과 수다 떨며 놀던 그 시절, 순수하고 맑기만 했던 그 추억이 그 친구의갑작스러운 부재로 나에게는 슬픈 추억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