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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y 20. 2023

사랑의 결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어스름한 침실 창가에 새벽빛이 스며드는 아침이면 부드러운 손길이 나의 아침을 깨워준다. 작은 언덕길이라도 내 손을 잡아주며 나의 안전을 살펴준다. 이렇게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  많이도 걸렸다. 본래 세심하고 정 많고 여리고 다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주 나에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건강을 염려하며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애정을 쏟는 그런 사람이다. 그것을 확인하기까지 40여 년이나 걸렸다.


결혼은 나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에는 사랑도 반듯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시작은 영이었지만 만들어 가면 된다고, 그도 그럴 것이라고 매달려온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서글픔만 더해주는 외사랑이었다. 그래도 사랑은 끊임없는 노력이라고, 나 자신을 토닥이고 인내하며 친정에서 받지 못했던 사랑까지도 갈구해 온 세월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은 성실하고 근면하고 완벽하다. 그에 비해 난 작고 외로운 세월을 살아왔기에 가슴 넓은 남편 품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오직 남은 가족들을 건사해야 한다는 무게감으로 늘 날이 서 있었고 메마르고 피곤했고 내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더구나 7남매라는 적지 않은 형제들 틈에서 자라다 보니 비록 없이 살아도 된소리 한번 하지 않으셨던 우리 부모님 밑에서 자란 환경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조금은 감성적인 내 성격 탓에 그런 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랬던 그가 이제 퇴직을 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면서, 자신의 소임을 다한 사람처럼 나를 돌아봐 주었다.

아주 느리게.

천천히.


하지만 이미 기다림의 시간들에 지쳐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노라고, 미친 듯이 내가 못했던, 해보고 싶은 일들을 찾아다녔었다. 그깟 사랑이 무어라고 다 한가로운 사람들이나 하는 개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여기며 한동안 외면하고 살았다. 하지만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여행을 다니며 그곳에서도 서로 다른 여행방식을 맞춰나가며, 60이 훌쩍 넘어서야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란히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혼자의 삶일 때는 나 하나만 잘 살면 되지만, 둘이 함께 가는 길이다 보니 남편가족 또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남편의 모든 집안배경과 성장과정까지 나에게 고스란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시골이지만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시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두 번째로 시어머니를 들였고, 남편은 7남매 중 누나 둘에 세 번째 귀하디 귀한 장남으로 태어났고, 남동생 셋과 여동생 하나가 있다.   


머슴을 몇씩이나 두시고 풍족하게 사시던 시아버지께서는 산을 팔아 서울로 부모님과 7남매(모두 11명)를 데리고 사업을 하시겠다고 올라오셨다. 아무런 경험도 없이 다른 사람 말만 믿고 벌인 사업들은 불 보듯 뻔히 실패했고. 결국 병에다가 가세까지 기울어져 가면서,  짐을 남편에게 모두 떠넘기고 그렇게 가버리신 것이다.




혼 당시 아무것도 없는 이 집에 빈손 들고 온 나와 시어머니, 늦둥이로 낳으신 중2 시동생과 살았다. 결혼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많지도 않은 인간관계까지 정리했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은 월급에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절약하고 알뜰하게 사는 길 밖에 없었다. 내 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사는 동안 살아내야 했기에 적은 월급임에도 2만 원씩이라도 떼어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 작은엄마를 따라 계를 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목돈이 되면 이자놀이를 해서 더 큰돈으로 불리고, 단위가 커지면 안전한 은행으로 넣어서 관리를 했다. 월급 타면 무조건 저축부터 하고 모자라면 위집에서 하숙을 치던 진이 엄마에게 빌려 쓰고 보너스가 나오면 기도 했다.


그렇게 지독하게 살아내야 했던 것은 나의 선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고.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자식들에게만큼은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가난이라는 것을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그것이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이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지만 건물주가 꿈이라는 우리 딸이 가끔 내가 했던 말을 했다. 돈 없다는 사람들이 살 거 다 사고, 먹을 거 다 먹고살면서 돈타령하는 거 보면 이해가 안 된다고.

그랬다.

참 많이도 지독하게 살았다.

물론 남편의 공도 컸다. 서울에서 지방까지 몇 시간씩 걸려 출퇴근하며 늘 피곤에 절어 살면서도 단 한 푼도 헛되게 쓰는 일이 없었다.




결혼 후 바로 임신이 되었고, 다음 해 정월초하루 밤 12시에 산기가 있어 병원에 갔다. 첫 출산이라 시간이 걸리겠다는 소리에 남편은 매형들이 한잔 하자고 한다며 시고모님 댁으로 가버렸다. 그 사이 새벽에 혼자서 통을 겪으며 딸을 낳았다.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았다. 그때는 너무 돈이 없었다. 약간에 입덧이 와서 임신인가 했고, 집 앞에 있는 작은 개인병원에서 확인하고는 출산일이 다 되어도 소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또 병원에 갔다.


다음날 청소를 하고 빨래까지 해서 널어놓고는 병원에 가서 촉진제를 맞고 둘째낳았다. 그런데 아들이 탯줄을 목에 감고 나오는 바람에 난산이었다. 애 낳았다고 미역국을 가져다주었지만, 몇 수저 지도 못하고 어지러워 먹은 것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그럼에도 어그적거리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왔다. 마침 출산비도 넉넉지 못했고 비는 내려서 스산하기만 한데 난방도 곤란하다 하여 저녁 무렵 퇴원을 했다.


물론 산후조리도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도 내가 안고 가야 할 아픔이기에 이유를 다 말할 수 없을 뿐이다. 그래도 그런 일들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게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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