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써 내려가는 글 중에는 과거든 현재, 미래이든 간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올바른 길이 아니다. 그 시절에도 일부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선생님들께서는 교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고, 참스승으로서 존경받으며 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정성으로 가르치셨다.
학교에서 체벌이 선생님 마음대로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하필 큰아이 담임선생님께서 잦은 체벌로 이름을 올리신 분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7살에 입학하여 키도 작고 말수도 적은 아이가 행여 맞고 올까 봐 노심초사였다. 극성엄마가 되기로 했다. 치맛바람 휘날리며 학교를 드나들었다.
그렇게도학교에 오면서 촌지는 안 준다고 옆반 선생님 눈치까지 받으면서도 굳세게 버티다 전교녹색어머니회장이 되었다. 이유는 같은 반 엄마들이 두 아이 모두 학교에 다니니 그 정도 봉사는 해도 된다며 밀어붙여서다. 일도 하러 다니고 바쁘게 살았지만 받아들였다.
그제야 당당하게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에둘러서 말했지만 결론은 내 자식은 때려도 내가 때릴 것이고, 남이 때리는 것은 딱 질색이라고. 회장이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고 더 이상 담임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초등학교교장선생님의 위력은 대단했다.
고백하건대 진정 참교육과는 멀고 먼 방법이었지만 **의 시대를 함께 하고 말았다. 다 같이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로서 해서는 안 되는 정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각 회장단이 모이자교감선생님의 일장연설이 시작되었다. 요지는 교장선생님께 드릴 00을 모아 달라는 것이었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어머니회장 지휘아래 금액이 정해지고,내게도할당된 금액을 요구했다.
상도동 어디인가 생전 처음 가보는 미닫이가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대표회장이 한턱 쏘는 자리였다. 한상 가득 요리가 오르내리고 술잔도 돌아가니 2차 타령이 시작되었다. 각 단체회장은 보통 고학년에서 선출되기 때문에 모두 연배가 있으신 분들이고, 그에 비해 나는 저학년 엄마에다 아이들도 일찍 낳아 나이도 어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완전 초짜 회장이었다. 그곳에 모인 회장들은 그야말로 잘 나가는 사모님들이었다. S대. E대 등등을 나오고 한강뷰가 끝내주는 아파트에 살면서 가정부에게 저녁을 맡기고 온 사모님들이었다.
그제야 내가 잘못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동서가 백화점에서 사준 때깔 나는 정장을 차려입고 간 나의 젊음을 능가할 순 없었는지,자꾸 내게 시선이 몰려 그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취기가 오른 교장, 교감의 눈길을 피해 온다 간다 말없이 슬그머니 빠져나와 도대체 여기가 어디쯤인지 몰라 아까운 택시비를 날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모임에서 들었다. 그날 저녁 2차를 가서 어찌어찌했다고. 그날 저녁 날린 택시비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반포에 있는 일식집에서 다시 모였다. 그날은 다행히 조용히 마무리 짓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그날 먹은 저녁을 몽땅 쏟았다. 처음 먹어본 고급스러운 초밥 때문인지,고추냉이 때문인지 속에서 생난리가 났었다. 내게어울리는 세상이 아니었다.
녹색어머니회장의아침은 늘 분주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아이들의 등교준비를 미리 챙겨주고, 등굣길 건널목으로 녹색당번인 어머니들을 만나러 갔다. 빠진 분 없이 모두 나오셨는지, 불편한 건 없는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정해진 건널목들을 찾아다녔다.
유난스러웠다. 누가 시킨 적도 없다. 갑자기 못 나온 분이 계시면 대신 서고, 끝나면 학교에 깃발을 반납하고 왔다. 선거에 나갈 것도 아니면서 참 열심히 했다. 회장으로 있는 동안 어떠한 사고도 일어나거나, 사고를 초래할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00이라는 분의 지휘아래 각 학교 녹색어머니회 회장들이 모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멋지게 제복도 입혀주고, 학생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통안전교육도 받았다. 교육을 받았으니 내 인생 처음으로 학생들이 아닌 천방지축 유치원 아가들 앞에서 교통안전에 대한 교육을 하기로 했다. 교육에 필요한 장비들을 지원받아 야심 차게 리허설을 하며 열심히 준비했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하고 열정을 쏟아부으며 준비했건만, 막상 교육을 시작하자 내 목소리는 달달 떨리고 아가들은 떠들어대고 난장판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미소로 한 명 한 명 체험을 시키며, 교통안전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교육이 끝나고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유치원 선생님들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친절하게 잘해주셔서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창피하지만 별짓거리를 다하고 다녔다. 어찌나 혼이 났던지 절대로 다시는 그 교육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3학년이 되면서 또 다른 경우에 직면했다. 물론 내손으로 봉투를 내미는 일은 없었지만 아들이 1학기에 부반장을 했다. 2학기에는 힘들다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곱상하고 착하기만 했던 아들은 여자아이들의 몰표에 가까운 표를 받으며 반장이 되고 말았다. 나의 치맛바람이 다시 펄럭였다. 담임선생님께서 교감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하는데 3교시 끝난 후 가야 하므로 4교시를 부탁하셨다. 며칠 동안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조용히 자습시간을 지키며 하교지도까지 하고 오후 출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담임선생님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스승의 날 다시 한번 아들 반 친구들에게 교통안전교육을 했다. 아~할 맛 났다. 말도 통하고, 조용하고. 이게 진짜지.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훗날 그 단체가 누구와 관련이 있는지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때 헛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그분은 열심히 정치를 하고 있다.
ps. 결코 아이들 교육에 도움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그 후론꼭 가야 하는 일들 외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값진 교훈을 얻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