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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Jul 18. 2023

마지막 직업은 상담교사였다  

배움의 결실

가장 단정한 옷을 입고, 한 듯 안 한 듯 옅은 화장에, 마음만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교장실로 갔다. 굳이 독대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때는 바야흐로 이미 두 아이를 잘 키워내고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당당한 성인이었다. 취업이 되었음에도 출근 한번 못해보고 힘없이 포기했던 실업고 3학년 가난했던 그 학생이 아니다. 되든 안 되든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과정이나 이유야 어떻든 간에 나를 선택해 주셨던 이 학교에서 꼭! 내 꿈을 펼쳐 보겠노라고, 마지막 결정권자인 교장선생님께,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어필을 하고 돌아왔다.


이미 정해진 절차에 따라 순조롭게 결정되었던 일이 출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취소통보가 날아왔다. 도저히 평범한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었다. 결국 직접 찾아가 교장선생님과의 독대를 요청했다. 그런 나를 무척이나 불편해하는 학교담당자께는 죄송했지만, 그냥 덮고 넘어가기에는 그 실망감이 오히려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미 초등학교 상담교사가 되었다고 모두에게 알리며, 폭풍 축하까지 받은 것은 물론이요, 해오던 일도 정리했던 상황이었으므로 허탈감이 밀려왔다. 소위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이 합격취소라니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도 왜 그들이 합격을 취소했고, 다시 출근을 결정했는지 정확한 유는 알 길이 없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렇게 순탄치 못한 과정을 겪으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초등학교 상담교사가 되었다. 이미 자존심은 추락했고, 출근도 전에 학교라는 곳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지만, 초등학교는 어린이가 주인이다. 나는 가르쳐야 하는 교사이고, 비록 계약직이지만 내 모든 열정을 담아 최선을 다해보리라 다짐했다.




방송대를 졸업하던 그 해에 각 학교에서는 상담실을 설치하고, 상담교사를 채용하는 곳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무엇인가 공부에 결실을 맺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던 시기였기에 이 또한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마침 학생상담자원봉사자 샘으로부터 채용하는 학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오랜만에 정성껏 이력서라는 것을 써보았다. 늦깎이 학생이었음에도 여느 대학생과 다를 바 없는 패기와 일에 대한 의지는 충만했고, 뭐든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만큼은 하늘을 찌르던 때였다.


졸업하며 취득한 자격증뿐만 아니라, 상담활동을 이어오며 틈틈이 사비를 들여가며,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청소년상담에 필요한 것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취득해 놓았다. 미술심리치료, 학교폭력예방교육사, 인성교육, 생명존중교육 등등 컴퓨터활용능력까지 언제든 학교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는 교육이라면 빠지지 않고 섭렵했다.


예상치 못했던 과정을 격었지만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순간이다. 어린이들은 배울 권리가 있고, 교사는 가르칠 의무가 있기에 나에 사적인 감정들은 철저히 배제했다. 지원한 초등학교는  아파트단지를 끼고 있는 아담하고 예쁜 초등학교였다. 자소서에도 일을 향한 나의 열정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듬뿍 담아 제출했었다. 며칠을 얼마나 가슴 조이며 기다렸는지 출근하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기뻤던 마음만 가슴에 담고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어린이들을 만나러 갔다.




이미 각 학교에서 집단상담을 수년을 해왔기에 학교는 내게 익숙한 곳이다. 다만 얼마 되지 않는 급여를 받게 된 것이 다를 뿐이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출근해 보니 상담실은 맨 꼭대기층에 덩그러니 텅 빈 교실로 나를 맞아주었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다. 이곳을 어떻게 꾸며갈 것이며, 전임자가 없으므로 혼자서 모든 것을 창조해 나가듯이 연간, 월간, 주간계획표 작성에 들어갔다.


며칠 후 부장님께서 수업일정이 담긴 파일을 보내주셨다. 그때부터 나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일정이 매일 오전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상담사 초년생이 감당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하라면 해야지. 오전에는 대부분 수업을 들어가고 오후에는 상담수업자료를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혼자로는 전교생 수업이 어렵게 되자 사회복지사선생님까지 저학년 수업에 들어가야 했다. 물론 수업자료는 내손에서 만들어져 제공했다.




더 놀랐던 것은 보수교육으로 인근 학교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이렇게 수업을 해대는 상담교사는 나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수업을 들어가는 선생님은 단 한분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능력이 되니까 맡겼겠지 싶어 내 인생에서 가장 최선을 다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심지어는 상담자료 ppt를 만드느라 시간에 쫓기자, 집에까지 싸들고 와서 밤늦도록 일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부장님께서는 잡다한 업무 중에서 조금 미진한 부분이 있다 싶으면 도움도 주시고, 안정을 찾아가던 중에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며칠후면 학부모총회가 있으므로 직접 학부모 교육을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갓 들어온 초년생 상담교사에게 가혹한 처사였다. 흑~ 상담실안내는 하겠지만 학부모교육만큼은 외부강사님을 모시겠다고 했지만, 그 또한 불가였다. 예산도 충분하고, 타학교들도 그렇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할 수밖에 없었다.


아 ~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상담실을 소개하는 것은 모두 내 일이니 어렵지 않았다. 학부모교육에서 사달이 나고 말았다. 마이크를 한 두 번 잡아본 것도 아니건만 어느 순간부터 목소리는 갈라지고 엄습해 오는 긴장감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학부님들께 적합한 이론을 찾아 ppt를 몇 날 며칠 만들어 수없이 연습했건만 무용지물이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도 안 난다. 질문시간도 생력하고 급히 마무리했던 기억만 있다. 요렇게 나를 곤란하게 하시다니....

안 한다 했지요!!!




목이 약한 나는 늘 목에 뭔가를 두르고 물병을 들고 다니며 정말 열심히 했다. 로는 컴퓨터가 작동을 안 해 ppt활용이 불가능해도 당황하지 않고 모든 자료는 내 머릿속에 있으므로 수업에 차질이 없도록 줄줄이 읊어댔다. 반복에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그때 체험했다.

선생질이 체질인가 봐!

잠시 그런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그해 가을 딸이 결혼을 했지만 학교 측에는 알리지 않았다. 그만두는 마당에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어렵게 시작했던 상담교사인데 결코 쉽게 그만둔 건 아니었다. 수업과 업무를 줄여주겠으니 계속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있는 동안 최선을 다했으므로 더 이상에 미련도 없고, 다른 상황들도 내발목을 잡았다. 더구나 내가 계속 근무하게 되면 20대인 사회복지사선생님이 그만두어야 하는 얄궂은 상황이었다. 


또한 남편은 명퇴를 하면서 내가 집에 있기를 원했고,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가지 못했던 해외여행도 함께 가길 원했다. 그에 더해 시어머니께서 약간에 치매가 시작되면서 주말마다 목욕을 시켜드리고 있었기에, 도중에 그만두어야 할 경우도 배제수가 었다. 아쉽지만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충분히 감사했고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마음의 상처는 있었지만 해맑은 어린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만큼은 더없이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았다. 고단하면서도 즐거웠던 만큼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시간으로 가슴에 남아 늘 새로움을 꿈꾸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직업은 상담교사였다.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글을 쓰는 동안에도 힘이 들어 초고도 오래 걸리고, 고는 더 오래 걸렸다. 써 놓고도 편치 않은 마음에, 발행에 시간이 걸렸다.

<사진은 본글과 무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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