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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와 도너츠

by 유명

외할머니는 참외의 고장 성주에서 외삼촌네와 함께 사셨다.

농번기가 지나고 한가해지는 겨울이 되면 우리집에 가끔 오셨다.



고모나 외삼촌이 우리집에 오면 참 좋았는데 외할머니가 오면 조금 싫었다.

고모나 외삼촌은 정구지 지짐을 구워 주거나 옛날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고 친구처럼 우리랑 잘 놀아 주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집안일만 하셨다.



설거지를 하셨고, 국을 끓이셨고, 반찬을 만드셨다.

무거운 이불빨래를 하셨고 마당을 정리하셨다.

바늘과 실을 들고 뭔가를 꿰메셨는데, 그때마다 나를 불러 실을 꿰어 달라고 하셨다.

하이타이를 사오라거나 들깨가루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셨다.

천원을 가지고 가서 육백오십원 했던 하이타이나 삼백원 했던 들깨가루를 사고나면 잔돈으로 뭔가를 사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잔소리도 많이 하셨는데, 주로 정리정돈을 잘 하라거나 놀때 옷을 더럽히지 말라는 얘기들이었다.

새벽에 오는 청소차에 쓰레기도 버리셨다.

겨울이라 연탄재가 많아 첫째인 나를 깨우셨다.

추운 겨울 새벽. 밖은 춥고 깜깜한 엄마는 잠만 잤고 나를 깨우는 외할머니가 밉고 짜증이 났다.

연탄재나 쓰레기가 담긴 스덴 찜통같은 것을 들고 외할머니를 뒤따라 갔다. 할머니가 쓰레기차로 쓰레기통을 던지면 곧장 내가 들고 있던 것을 할머니께 건넸다.



아빠는 아들이 없어도 우리 딸 셋을 너무 예뻐 하셨는데, 외할머니는 아들없이 딸만 낳은 엄마가 죄인이라도 되는 마냥 사위인 아빠에게 미안해하고 면목없어 하셨다.

잠시 와 계시는 동안 외할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뭔가를 하셨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뜨뜻한 아랫목에 누워 쉬시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피부가 까맣게 그을리고 우리한테 잔소리하며 혼만 많이 내시던 외할머니가 언제 다시 시골로 가시나 기다렸다.

막상 가신다고 하면 왠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초등학교 10살때 엄마 나이가 36살이었는데, 내가 생각하던 그때의 엄마는 이미 너무나 완전한 어른이라 외할머니가 와계시는게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성주에 살던 외사촌 동생 3명이 공부를 위해 도시로 나와 외할머니와 살게 되면서 외할머니는 우리집에 거의 안오셨다.



그러다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외할머니가 몸이 안좋아서 우리집에 일주일 정도 와계셨다.

사회초년생이었던 내가 퇴근후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는 항상 누워 계셨다.



잠시도 쉬지않고 무언가를 하시고, 엄마 힘들까봐 우리한테 잔소리를 하시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엄마의 엄마가 늙어가고, 아프고, 기력이 없어지고, 죽음과 가까이 다가간다는 느낌을 나는 그때 절절히 느끼지 못했다.

다만 아프신 외할머니가 뭘 좋아하실까 고민고민 하며 사간 것이 설탕이 뿌려진 도너츠였다.



좋아하실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외할머니는 잘 드시지 못했다.

그때 엄마는 그냥 조금 걱정하는것 같았고 어쩌면 덤덤해 보이기도 했는데 ,자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 엄마 나이가 딱 내나이쯤이었다.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엄마도 외할머니의 애쓰이는 막내 딸이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엄마도 멀리 사는 90이 다 되어가는 언니가 보고 싶을 것이고 , 돌아가신 엄마도 보고 싶을 거란 생각에 이제야 조금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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