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 -9번째 수업
책 쓰기 수업은 표지 디자인을 하는 방법이나, 한글 편집 등을 배우느라 점점 더 분주해졌다. 7월의 마지막 시간에 한미숙 작가에게 미리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없다고 미리 말했다.
“작가님, 어머니가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본가로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몇 시간 떨어진 곳이라, 마지막 몇 주는 책 쓰기 수업에 참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신가 봐요?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골절이라 거동이 불편해서 한동안 같이 지내려고 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면 책을 완성하지 못하시나요?”
“아닙니다. 책은 꼭 완성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나오실 수 있을 때까지 나오시고, 못 나오시더라도 책 완성하시고, 등록하신 다음에 연락을 주시면, 함께 하지는 못해도 다른 분들께 책 소개도 해드릴께요. 완성된 책은 다른 분들과 함께 도서관에서 구매할 거예요. 그때 함께 받아 보실 수 있게 보내드릴게요. 지금까지 열심히 참여하셨는데, 마지막 시간에 직접 오지는 못하시더라도 같이 마무리하는 것으로 진행하면 어떨까요?”
“그럴 수 있을까요? 저야 당연히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그럼 조건이 있어요. 이번 클래스에서 유일하게 소설을 쓰셔서 내용이 무척 궁금한데, 도서관에서 구매할 책 중에 한 권 주시겠어요? 제가 구매해도 되지만, 작가님이 직접 주시는 책을 받고 싶어요.
대신에 등록하시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 있으시면, 이메일로 언제든 문의 주세요. 온라인으로라도 쉽게 마무리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진행 과정도 감시하고요. ㅎㅎ 제가 책을 사면 되는데 웃기죠?”“아닙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당연히 책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직접 드려야 맞는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그러면 복잡하니까 도서관에서 책 구매하면, 제가 받아서 보내드리면서, 한 권 가져갈게요. ㅎㅎ 그럼 언제까지 나오실 수 있을까요?”
“마지막 2주 정도만 못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지막 2주만 못 나오신다면, 조금 빨리 등록하시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원고는 얼마나 더 쓰셔야 하나요?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일주일 정도면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표지 디자인과 편집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원고 마무리 될 시점에는 표지도 완성되어 있도록 진행 가능할까요?”
“네? 표지랑 편집을 동시에요? 아 그렇게 하면 조금 빨리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한번 해보겠습니다.”
“원고 쓰다가 힘들 때, 표지 빨리 완성하시고, 내지 편집도 동시에 진행하시면서, 원고 마무리하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네!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서둘러 보겠습니다. ”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다음 주에 봬요.”
“감사합니다.”
마지막 2주 정도는 참여를 못 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짧은 순간 동안 책을 마무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한미숙 작가는 서투른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재촉하는 능력이 있었다. 첫 독자로 책 한 권을 달라는 선생님께 완성을 미루겠다는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나를 재촉하는데 온 정신이 팔려서 마음으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한미숙 작가님은 책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만나고 있었다. 그 아름답고 각기 다른 우주를 들여다보는 것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운 소리들로 느낄 수 있었다.
글에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담는 것임을 믿는 순진한 듯 순수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어머니 집으로 가려면 일주일 남짓 남았다. 한미숙 작가와 약속을 한 덕분에 더 부지런히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 했다. 처음 배워보는 표지 디자인은 쉽지는 않았지만 내 손으로 모든 것을 완성해가는 재미가 있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표지는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다.
책 편집을 위해서 지금까지 쓴 원고를 내지 디자인이 된 양식에 붙여넣고, 뭔가 책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을 잠시 느꼈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나 원고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길게 봐도 2주 안에 원고를 마무리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함께 글을 쓰는 분들에게도 마지막 주에는 수업에 올 수 없을 것 같지만, 한미숙 작가와 약속 덕분에 조금 빨리 책을 등록하게 되었다고 말해두었다.
오늘따라 모두 모여서 글을 썼다. 아이들 때문에 자주는 못오던 이명수 역시, 오늘은 함께 도서관에서 글을 썼다. 학생이라도 된 듯이 함께 쉬고 함께 간식을 먹기도 하면서 각자 열심히 시간을 보냈다.
강사랑은 이미 원고를 완성하고, 여러 출판사에 연락해 본 끝에 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되었다고 했다.
“저는 책 쓰기 수업 마지막 시간까지 책이 안 나올 것 같아요. 출판사와 계약을 했는데, 빨라도 한 달이나 더 있어야 책이 나온대요.
같이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아는 출판사 사장님께 직접 찾아가서 부탁을 한 것이지만, (외국 원고를 베끼어 쓴 것이라서) 팔릴 만한 책을 알아본 거겠지, 절박한 심정으로 아는 사람을 다 수소문하고, 모르는 사람까지 찾아가서 계약하게 된 것이니까 내 능력이 맞지! 당당하자!’
강사랑은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것 같았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하나씩 이뤄가는 추진력은 대단했다.
“사랑씨 자랑하는 거예요? 우리도 출판사에서 책 내고 싶지, 안 내줘서 못 내는 거지 한 달쯤 늦게 나오면 어때?”
이순자 아주머니가 부럽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축하한다는 뜻입니다.”
이명수가 부드럽게 통역을 했다.
“맞아요. 축하해요. 부러워 죽겠네, 어쩜 그렇게 책도 잘 써서 출판사에서 책을 낸데~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사실 열심히 여러 군데 출판사를 다 알아 본 거예요. 엄청나게 고생했어요.”
“우리는 고생해도 안 돼~ 정말 좋겠네, 나 같으면 동네방네 자랑하겠네~ 책 나오면 우리도 줘요.”
“네! 저도 자랑할 거예요. ㅎㅎㅎ”
“저는 책나오면 사겠습니다. 축하드려요.”
이명수가 말했다.
“아니에요. 책이 무사히 나오면 다 드릴게요. 아직은 진짜 책이 나온다는 실감이 안 나요. 나와야 그때 겨우 안심될 것 같아요.”
“걱정 말아요. 안 봐도 잘 썼을 것 같고, 잘 팔릴 거예요.”
“그러게요. 나중에 유명해져서 모른 체하지 말아요.”
“감사해요. 알겠습니다. 모른 체 안 할게요.”
축하의 말이 오갔다. 이 순간만큼은 질투하는 사람 하나 없이 같이 꿈꾸고 있었다.
그때, 내 전화기가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고 강사랑이 알려줬다.
“전화 오나 봐요. 주머니에서 빛나요.”
채권추심 전화인 줄 알고 확인하고 끊으려는데, 여동생에게서 연거푸 걸려 온 전화였다. 어차피 어머니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알려야 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전화를 받고 싶지는 않아서, 이따가 다시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광고네요.”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몇 통이나 전화했는지 확인해보려는데 문자가 들어왔다.
‘어머니 돌아가셨어. 오늘이 발인이야.
엄마가 오빠 부르지 말라고 하도 간곡하게 유언이라고해서 이제 문자 보내. 그래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엄마가 오빠도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마. 엄마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미리 알면 오빠도 안 올 수 없고, 나중에 알려주는 것은 또 아닌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전화한 거야.
지난번에 한 말은 미안해 다 오빠 걱정해서 한 말이야. 이따가 장례 끝나고 다시 전화 할게 전화 받아. 그래도 엄마가 오빠 사랑한 거 알잖아. 전화할게.’
그저 골절일 뿐이었는데,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머리가 멍해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심장이 뛰었다. 숨이 막혀서 온몸을 비틀면서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기분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온몸이 굳어져 겨우 가는 숨을 뱉고 있다. 힘이 빠지면서 근육은 굳어가고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듯이 내 몸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세상이 갑자기 느려진 것 같으면서 정신은 선명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는데 움직일 수 없고, 소름이 돋고 한기가 돌았다. 겨우 5분 전에 문자를 봤을 뿐인데 30분은 지난 것 같았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희미해지고, 갑자기 풀벌레 소리만 가득 귀에서 쟁쟁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꽉 움켜쥐기라도 한 듯 어깨에 통증이 느껴지면서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에요?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강사랑이 나를 보고 물었다.
말을 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놀란 이명수가 내 팔목을 힘주어 잡았다. 그때야 느려진 시간 속에서 분리된 것 같던 정신과 몸이 다시 하나가 되면서,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집에 일이 좀 생겼습니다.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온몸에 힘을 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강사랑이 급하게 따라 일어나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열람실에 들어가 노트북을 챙겨 나오는데, 이미 도서관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말도 나오지 않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차에 탔다.
“집에 내려드리면 될까요?”
“네”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멍한 와중에도 강사랑의 마음의 소리가 그 짧은 순간 내내 들려 괴로웠다.
‘무슨 일이야!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더니 무슨 일 생겼나? 설마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 위독하신가? 다른 일 일까? 별일 아니겠지? 집에만 내려줘도 되나? 엄청 충격받으신 거 같은데,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해 죽겠네!’
나는 인사도 없이 차에서 내려 집으로 좀비처럼 걸어 들어갔다. 강사랑이 따라 내렸는지 차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서서 괜찮다고 인사할 수가 없었다. 정신은 마비됐고 몸은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몸에 갇힌 인질이 된 것처럼, ‘태워다 주셔서 고맙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인사해서 보낼 수가 없었다. 정신은 몸에 갇혀서 뒤를 돌아다 볼 수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집에 들어와서 현관문을 닫고 그대로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다 기대서 입을 벌리고 천장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일어나서 소파까지만 가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앉아 있은지 한참이 지나서 피곤이 몰려왔지만, 몸은 점점 무거워져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시는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술 취한 사람처럼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잠이 들었다가 고개가 떨어지면서 깨어났다. 그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침대로 가서 비스듬히 백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앉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익숙한 천장 무늬만 보고 있었다. 다시 깜빡 잠이 들려는데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오빠, 나야….”
“어”
“미안해….”
그 한마디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동생은 전화기 너머에서 오열했다. 그리고 울음이 터진 채로,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미 안해, 으흐 흐으으 너어 무으 미안 해 흐으 ㅇ으 흐흐으 으으흐”
아직 슬픈지 아닌지 결정하지 못한 멍한 상태인데도,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무얼 물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다시 전화할게…. 으으으ㅇ흐”
한참을 울던 동생은 겨우 이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참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훨씬 진정이 된듯한 목소리로,
“오빠 미안해.”
하고 겨우 말했지만, 다시 울음이 터졌다. 그래도 이번에는 금세 진정을 하고는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 했다.
동생은 어머니 집에서 조카까지 데리고 함께 지냈다. 생각보다 어머니 거동이 훨씬 불편해서 어머니와 아이들 동시에 돌보기 어려웠다. 조금은 상태가 괜찮아진 어머니를 잠시 놔두고 이틀 동안 시댁에 조카를 맡기러 다녀왔다고 한다. 문제는 골절이 생긴 이유가 뇌출혈의 전조증상이었던 것을 아무도 몰랐다. 손에 잠시 힘이 빠지면서 물건을 떨어트리면서 다친 것이었는데, 아직은 젊은 어머니의 나이와 평소 지병이 없었던 것 때문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급히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쓰러져 있었고, 병원으로 옮기는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손을 쓸 새도 없이 돌아가시게 됐다고 한다.
내가 싸우고 돌아간 날, 그간 쌓였던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오빠만 챙겨서 서운했다느니, 결국 엄마를 돌보는 것은 동생인데, 서운하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내 걱정만 하셨다고 한다. ‘병원 치료를 받아서 결혼도 하고, 직장도 다시 다녀야 할 텐데’하면서 같은 이야기들을 수없이 반복하셨단다. 그러다 신신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나 죽어도 오빠 부르지 말어. 너네 고모들이랑, 내 친구들이랑 너네 오빠 잘 나간다고 유세 떤다고 고깝게 봤는데, 이제 와서 미쳐서 회사도 그만두고 별일 안 하고 시골에 처박혀 있다고 어떻게 하니. 회사 사람도 하나도 안 올 텐데, 거기다 너네 오빠가 예전처럼 또 혼잣말하거나 갑자기 소리라도 지르면 장례식장에서 어떻게 수습할래.
니가 봐도 너네 오빠 점점 심해져서, 언제 사고 칠지 몰라서 조마조마하잖아.
나는 그꼴 못 보니까 너네 오빠 외국 갔다고 해. 너네 잘 키운 거 하나 내세우고 살았는데, 가는 길에 꼬수워할 것들 생각하면 눈을 못 감을 것 같으니까. 오빠 외국 갔다고 해. 알았어? 몰랐어?”
동생도 내가 퇴사할 즈음처럼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면서, 장례식장에서 떠들까 봐 걱정됐다고 한다. 제부는 그래도 연락하라고 했지만, 아이들이나 남편 보기도 부끄럽기도 하고, 어머니의 유언도 들어드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너무 미안하다고, 연신 울면서 사과했다.
어쩌면 나는, 외국보다 더 멀리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주변 사람들의 곤란을 돌아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고, 어머니와 동생이 평생 나를 위해 연기를 해준 것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었다.
“알았으니까. 괜찮아. 너도 장례 치르느라 고생했다.
일단 쉬고 나중에 이야기하자.”
“미안해 오빠”
“엄마는 평소에 말하던 대로 아빠 옆에 뿌렸어. 그리고, 나도 일단은 마음도 정리할 겸 애 아빠 따라서 두세 달은 캐나다에 있다가 올까 해. 이번에 다녀와서 우리도 아예 캐나다에서 살지 몰라. 엄마 집 정리해야 하잖아. 캐나다 다녀와서 같이 하자.
미안해 오빠.”
“알았어. 괜찮아.”
“사실 그날 있잖아. 나도 너무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나도 모르게 토마토 노래 부른 것 같기도해. 미안해. 캐나다 다녀와서 전화할게. ”
“응. 그래”
통화를 마치고 나서야 겨우 멍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슴은 여전히 답답했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남의 몸에 갇힌듯한 기분은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 왜 슬프지 않은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제야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머니가 없구나, 어쨌거나 그렇게 나를 지탱하던 끈이 또 하나 떨어져 나갔구나. 통화하기 전처럼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서 천장 무늬만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다가, 어느새 옆으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직 새벽이었다. 뭘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은 분주한데 할 일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어제 오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 허기가 졌다. 남의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놓고 아침을 먹었다. 아무 맛이 나지 않는 딱딱하게 굳어진 차가운 음식들을 목으로 넘기자 차갑게 정신이 돌아왔다. 아무데도 초점을 맞추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보면서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어 넘겼다. 처음에는 차갑던 음식이 점점 온기를 돌려놓더니 갑자기 열이 확 올랐다.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했던 것이 열을 내며 순식간에 올라와 오열이 되었다. 그대로 식탁에 앉아 한참을 가쁘게 헐떡이면서 소리 내어 울었다.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떠나 버린 어머니가 가여운 것인지, 화해도 못 하고 말다툼이 마지막이었던 것이 미안한 것인지, 미쳐서 날뛸까 봐, 아니면, 더 이상 자랑스럽지 않아서 장례식장도 못 가본 것이 서글픈 것인지, 나를 믿어주는 사람은 없어서, 나를 위해 평생을 연기해줄 사람도 없어져서 서글픈 것인지, 이처럼 곤경에 처한 상황에 슬픈 일이 생겨서 더 슬퍼진 것인지, 미안한 것인지, 자기연민인지, 원망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울음으로 터트리는 아기처럼, 우는 수밖에 없었고, 아기처럼 기력이 다할 때까지 들썩이며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사는 것은 항상 구차한 일이었다. 절대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중대한 감정에 사로잡혔다가도, 몸이 다시 살아 움직이라고 하는 명령을 거역하기 힘들다. 굳어지는 어깨와 불편한 자세 때문에, 구차하게 중차대한 감정에서 빠져나와 몸을 움직여 살아있으라고 명령했다. 눈물로 슬픔과 정신을 반쯤 덜어내고 난 후에 불편하게 굳어진 몸이 식탁에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살아있기에 납득할 수 없는 큰 사랑과 슬픔에도 항상 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