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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레비엔 Sep 02. 2024

씁쓸하게

빌라 단톡방은 쉴새 없이 시끄러웠지만 정작 빌라는 한동안 아무 일도 없는 듯 고요했다. 출퇴근 시간에만 문 여닫는 소리, 택배나 배달원의 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다. 이전에는 애써 무시하던 단톡방을 열심히 보면서,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고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다른 사람처럼 법적 절차도 진행하고 절망 속에서도 분주히 살아갔다.


이제 도서관에 출근하는 것은 루틴이 되었다. 이명수를 만난 날 이후로도 며칠간은 기사회생할 모든 방법을 뒤지는 것에 몰두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여기서 쫓겨나면, 어머니 집으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미친 아들이 되어 돌아온 것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싶어 할 사람이지만, 한동안은 따뜻하게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머니에게나 나에게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고, 곧 쓰디쓴 동거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쯤에 나를 사랑하지만, 언제라도 비난할 준비가 되어있는 여동생과 어머니를 앞에 두고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와 이직 과정을 설명하고, 더는 감당할 수 없어진 빚과 전세 사기 과정을 털어놓고, 파산할 수밖에 없음을 알릴 수밖에 없다. 물론 그전에, 내가 미쳤다는 것을, 마음을 듣는 능력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아프게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던 것을 멈추고 빚이라는 새로운 적에 맞서, 오랜만에 다시 사랑하는 가족이 될지도 몰랐다. 미친 사람이 되더라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슬쩍 들기도 했고, 정말 미친 것이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모든 상상은 씁쓸하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닥칠 현실을 미리 보고 싶지 않아서 퇴거 전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책을 쓰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쫓겨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책을 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마침내 책 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집에서는 여전히 감옥에 갇힌 듯 불안했지만, 도서관에서만큼은 퇴거 전 몇 주가 휴가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매일 도서관에 하루종일 앉아서, 내 소설 속 주인공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이내 다른 사람들도 내가 매일 도서관에 출근하는 것을 눈치챘다. 이명수도 시간이 될 때마다 도서관에 와서 아이들이랑 시간을 보내거나 함께 글을 쓰고, 저녁때 강아지를 산책시키면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강사랑도 책 쓰기 막바지 작업을 누구보다 빨리 서두르느라 퇴근 후나 주말이면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함께 글을 썼다. 장마철이 시작되면서 이순자 아주머니와 가장 많은 시간 함께 도서관에서 글을 썼다. 친절하게도 간식을 나눠주기도 하고 주말이면 사양하는 강사랑과 나를 집까지 데리고 가 저녁을 함께 먹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우리는 별 대화도 없이 함께 글을 쓸 뿐이었다.      


그렇게 2주가량 지나고, 빌라에 살던 사람들도 한둘 이사를 나가면서 단톡방은 더 시끄러워지고, 빌라는 더 고요한데 어수선해졌다. 빈집이 한둘 생기기 시작하면서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린다. 작은 행동이나 소리도 모두가 아는 것 같았고, 남은 가구가 적어지면서 음식 냄새만 나도 어느 집이 저녁을 먹는지, 누가 늦게까지 안 들어왔는지 알 것만 같이 점점 투명하게 불안해지고 있었다. 결국 나도 명도 기일 며칠 전에 나가겠다고, 집주인에게 연락해두었다. 집주인은 적당히 사려 깊고 적당히 철두철미한 사람이어서, 충분히 배려해 주면서도,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서 문자로 알려주었다.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게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우리 중 누구도 잘못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집주인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 이사 들어올 때부터 풀옵션으로 가구와 가전까지 구비되어 있어서 챙길 것도 많이 없었지만, 매일 조금씩 짐 정리도 시작했다. 어머니 집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작은 가전이나 식기 같은 것은 따로 챙겨가지 않아도 되었고, 집주인에게도 남겨두고 가겠다고, 미리 이야기해 두었다. 처음 이사 올 때 보다 더 단출하게 옷가지와 여행 가방 몇 개만 챙겨서 어머니 집으로 들어가면 된다. 더 이상 억울하거나 서글픈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어머니와 함께 살 때 중요한, 마음의 소리가 크게 들리는 증상도 더는 심해지지 않았다. 천천히 괴로운 이곳에서의 시간도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다만 어머니 집으로 옮기는 것은 또 다른 괴로움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나 동생에게 미리 알리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결국 미쳤다고 소리내 말해버린 가족들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평생을 장단을 맞춰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없이 미루고 있었다. 이런 것을 말하기에 적당한 때 같은 것은 없었지만, 미리 말해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 데다, 다리까지 다친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미리 말해봤자, 집안 정리를 한다고 어머니 일만 더 늘려드릴 것 같은 갖가지 핑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 전이나 하루 전에 전화하고 가는 것이 낫겠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책을 끝내는 것뿐이다. 집에 돌아가면, 평온하게 괴로워지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마지막까지 책 쓰기 수업에 참여하지는 못하게 되는 것이 아쉽지만, 책을 완성하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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