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행복을 만난다는 것
"찜질방 가면 안 돼요?" 일하고 있는데 둘째 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저혈압이라 사우나, 찜질방은 잘 다니지 않아 내키지 않았지만 한 번쯤 아이 데리고 다녀와도 좋겠다 싶어 알겠다고 했다.
퇴근 후, 찜질방에 가지 않겠다는 첫째와 남편을 위해 김치찌개 한 사발 끓인 후, 신이 나서 풍선처럼 날아가버릴 것 같은 둘째 손을 꼭 잡고 집 근처 찜질방을 찾았다. 신발장에 신발을 넣는 것부터 옷을 넣는 과정 모두 스스로 하겠다며 까치발을 들어 올리고 옷을 차곡차곡 넣는 모습이 아기 토끼 같아 웃음이 절로 났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찜질방은 한산했다. 누워서 티비 보는 중년 남성 두 명, 매트를 앞 뒤로 덮어 샌드위치가 되어 자고 있는 여성 한 분, 그리고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젊은이 둘이 마사지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걷다가 복도 끝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산속 옹달샘을 발견한 듯 우리는 달려갔다. 식당과 매점이었다. 일단 먹고 시작하자며 쿵작이 맞은 딸아이와 신중하게 키오스크 앞에 서서 메뉴를 골랐다. 맘 같아선 한 끼 든든하게 미역국과 돈가스를 시키고 싶었는데, 딸아이는 쫄면과 감자튀김 그리고 식혜를 먹고 싶다고 졸라댔다. 그래, 어쩌다 오는 곳인데 오늘 하루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하자.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신이 났는지 숟가락부터 휴지, 물 세팅까지 레스토랑 웨이트리스에 빙의한 딸이 분주히 돌아다녔다. 금방 식사가 나오고 쫄면을 한 입 베어문 나는 엄지를 들어 올렸다. "여기 쫄면 맛집이네!" 딸아이도 우쭐해서는 쫄면을 엄마처럼 마구 먹고 싶었지만 너무 매웠나 보다. 연신 물을 들이켜더니 쫄면을 먹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모두 내 차지.
새 모이만큼 먹고 일어난 둘째가 찜질방은 역시 구운 계란이지 하며 매점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혼자 1.5인분을 먹어 배가 부풀어 올랐지만, 아이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구운 계란을 들고 들판 위 소들처럼 한가로이 찜질방을 둘러보다 한옥 사랑방처럼 생긴 여성전용 공간에 들어가 자리 잡았다. 우리뿐이라 한옥펜션을 빌린 것 같았다. 매트를 깔자 눕고 싶은 욕망이 출렁거렸다. 갈색 가죽무늬 베개까지 세팅하니 완벽했다. 밥 먹고 누우면 안 된다고 배웠거늘 찜질방에서는 왜인지 자꾸 눕고 싶다. 누우니 부른 배가 옆으로 퍼지며 한결 편해진다. 방은 뜨끈하고 배도 부르고 슬슬 잠이 오려던 순간, 아이가 흔들어 깨운다. 계란 먹을 시간이라고. 너는 배고프겠지만 나는 배부르다고 주장해 봤지만 고양이 눈을 하고 같이 먹고 싶다는데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 설마 구운 계란 하나 더 먹는다고 배가 터지겠니. 그나저나 구운 계란을 너무 얕봤나 보다. 어디 가서 돌머리로는 뒤처지지 않을 것인데 머리 위로 내려친 계란은 생각보다 단단해 전혀 깨질 기미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계란을 깨고 소금 찍어 한 입 먹는데 캬 이맛이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목이 막혀 식혜까지 벌컥벌컥 먹고 나니 또 눕고 싶었다. 이 놈의 매트가 문제다. 깔려 있으니 눕고 싶은 건 당연지사. 등에 자석이 붙은 듯 다시 매트에 눕고 나니 눈이 자동으로 감긴다.
어린 시절 시골 외할머니댁이 떠올랐다. 또래의 이종사촌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사랑방에 앉아 있으면 점심상이 들어온다. 화려한 음식은 없어도 할머니 손맛이 들어간 각종 나물이며 국이 오른 풍성한 상이다. 다 먹고 나면 뜨끈한 온돌방에 흩어져 앉아 가져온 만화책을 낄낄대며 읽었다. 잠시 후, 소화시키라며 할머니가 숭늉을 가지고 온다. 조금 후에 설탕 솔솔 뿌린 누룽지가 등장한다. 배부르다고 그야말로 배부른 소리 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이건 간식이라며 배에 기별도 안 간다고 한다. 오도독오도독 강냉이 나갈 듯한 느낌을 받으며 먹다 보면 이제 진짜 배부르다. 늘어진 엿가락처럼 방바닥에 배 깔고 누우면 잠이 솔솔 왔다. 30분 정도 잤을까, 이번에는 엄마와 이모가 과일 한상을 내온다. 천연 소화제라며 기적의 논리를 펼친다. 안 먹는다고 하면 있을 때 먹으라고 옆구리를 쑤신다. 뭉그적거리며 과일을 입에 넣으면 그게 또 들어간다. 다시 누우면 이번엔 깊은 잠에 빠진다. 일어나니 저녁 먹을 시간이다.
배부르게 먹고 등 따습게 누워서 급한 일 하나 없이 사랑하는 딸과 함께 누워 있으니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등 뒤로 석양이 비추는 벤치에 앉아 고요한 강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평안했다.
아, 이것이.. 이런 삶이 바로.. 시인처럼 무언가 멋진 말을 하고 싶었지만 뇌까지 부른 것인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의식의 흐름대로 아이에게 말했다.
"예쁜아, 이것이 바로 돼지의 삶이 아닌가 싶다..."
아직은 돼지, 코딱지 이런 말에 용수철처럼 반응하는 9세 어린이는 돼지 흉내를 내며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기 시작했다. 나름 진지했는데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웃음이 확 터졌다. 넓은 방안을 둘이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굴러 다니며 웃고 나니 신기하게도 허기졌다. "매점 가자!" 손에 칸쵸 하나를 들고 신나게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삶에 큰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소박한 일상을 이어가기만을 바랄 뿐. 작은 행복이 하루하루 쌓이면 그게 기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