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쓸모
[서비스업 경력만 화려해지는데 괜찮은 건가] 1장
긴박한 20분
"천천히 먹어 학생. 하긴, 거기 아줌마가 좀 극성이지?"
시계를 흘겨보며 라면을 먹는 모습이 안쓰러웠나 보다. 파리바게트를 다닐 때, 항상 매장 바로 옆에 있는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주방장님이 실력 있어서 맛이 괜찮았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많을 때가 종종 있다. 주문이 밀릴수록 나는 초조해졌다. 밥 먹는 데 20분 이상 쓰면 같이 일하는 고참 아주머니가 성을 냈기 때문이다. 분식집 주방장님도 그 아주머니 성격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매장 바쁜데 뭐 이리 오래 걸려. 빨리 먹고 도와 줄 생각을 해야지."
나는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탔다. 그 사이에 고참 아주머니와 제빵사는 주방에서 점심을 먹었다. 하나 둘 씩 주문이 밀리기 시작했다. 나 혼자서 빵을 계산하다가 커피 타기를 반복했다. 동시에 주방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든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고참 아주머니는 느긋하게 소보루빵을 포장하러 나왔다. 그리고 꼭 한 소리를 잊지 않았다.
"여태 뭐 했길래 포장할 게 이렇게 남은 거야. 자꾸 스트레스받게 하면 남편 불러서 아작을 낼 줄 알아."
동기부여의 기술
입사한 날부터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고참 아주머니도 문제였지만 사장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다닌 곳은 파리바게트 가맹점이었고, 사장은 4대 보험료를 내지 않으려고 월급을 현금으로 줬다. 한밤 중에 매장으로 와서 월급봉투를 받아가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이 사실을 숨기려면 당연히 지인 위주로 채용해야 했다. 그런 매장이 정상적으로 굴러간다고 보기 어려웠다.
사실 그 가맹점은 내가 고른 직장이 아니었다. 집안 개인회생이 막 시작되었을 때, 나는 본사가 직접 운영하는 다이소나 편의점 매장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 밑에서 험한 일을 겪느니 아는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이 안전하다며, 주변 어른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모 지인이 운영하는 매장에 들어갔다. 그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고참 아주머니는 마음에 들지 않는 알바와 일해야 했고, 나는 내가 고른 적 없는 매장에서 꾸역꾸역 욕을 먹어야 했다.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조합이었다. 나는 금방 일할 의욕을 잃었다.
큰 회사가 좋은 이유
그래도 파리바게트에서 주 5일 하루 8시간 이상 일하며 1년 반을 버텼다. 내 정신건강은 더 나빠졌지만 공황장애로 진단받는 것은 좀 더 나중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사장이 하루 근무시간을 10시간으로 늘리려고 했다. 평소에도 한두 시간 씩 더 일을 시켰지만, 아예 장시간 근무를 못박으려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날, 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 뒀다. 일단은 살아야겠다 싶었다.
엄마는 굉장히 불안해했다. 나는 어떻게든 새 일자리를 찾겠다며 설득했다. 파리바게트에 들어갈 때는 열아홉이었고 아무런 경력이 없었지만, 이제는 스물하나 성인이었고 어거지로 생긴 1년 반 경력이 있었다. 실제로 파리바게트를 그만두고 2주 만에, 나는 다이소 부천역점에 파트사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에 보낼 돈 역시 밀리지 않았다.
부천역점은 본사직영점이었다. 매장도 더 넓고 훨씬 바쁜 곳이었다. 근무시간은 주 6일 하루 6시간이었다. 일은 마냥 쉽지 않았다. 빵집과 다르게 락스나 공구 같은 것도 다루다 보니, 허리를 다쳐서 그만두는 사람도 있었다. 진상 손님도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점장님과 직원들은 친절하게 일을 가르쳐 줬고, 근무시간을 마구잡이로 늘리지 않았다. 월급을 현금으로 주지 않았고, 점심시간을 1시간 씩 보장해 줬다. 빼빼로데이처럼 큰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다른 직원들과 틈틈이 잡담하며 커피를 마실 여유도 있었다. 종종 점장님이 부천역사 안에 있는 식당가에서 점심을 사주기도 했다.
부천역점이 두번째 아르바이트 자리였던 것이 나에게는 정말 큰 행운이었다. 만약 부천역점에서도 나쁜 일을 겪었다면 나는 완전히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부천역점에서는 나름 열심히 일했다. 1년 동안 여러 파트사원이 그만 두거나 쫓겨났지만, 나는 자리를 지켰다. 퇴사하고 나서 매장에 놀러갔을 때 같이 일한 직원들이 반겨 줬으니, 나름 잘 적응했다고 여겨도 좋지 않을까.
행복한 직장이라는 이상
흔히 일은 원래 힘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머그잔에 커피 따라 마시기처럼, 누구나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분업사회에서 '일'이 될 수 없다. 체력과 주의력을 전혀 쏟지 않아도 되는 일이란 무의미할 것이다. 일이란 노력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한 고통까지 감당할 필요가 있을까. 더 깔끔한 보고서를 쓰기 위해 머리를 쓰는 것은 필요한 고통이다. 하지만 직장상사의 변덕스러운 분노을 견디는 것까지 필요한 고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은 힘든 것이지만, 그 힘듦 중에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것은 분명 가능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19세기에 실천한 사람이 있다. 바로 영국 기업가, 로버트 오언이다. 당시 영국에서도 '일은 원래 힘든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했다. 채찍질과 굶주림이 없으면 우매한 노동계급은 나태해질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많았고, 노동자의 고통은 어쩔 수 없는 것, 또는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 기업가가 태반이었다. 이런 통념을 경험으로 반박한 사람이 바로 로버트 오언이었다.
1816년 초, 오언은 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에 10시간 반이상 일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에는 여섯 살 짜리 어린아이도 14시간 동안 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획기적인 근무시간 단축이었다. 오언은 열 살 이하 어린이는 일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 자기 공장 옆에 세운 학교에서 무료로 교육을 받게 했다. 오언은 나쁜 교육이야말로 범죄와 빈곤의 주범이라고 믿었고, 때문에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데에 항상 진심이었다. 여기에 더해 오언은 직원들에게 무료로 건강검진을 제공하고 벌금이나 해고 같은 처벌을 최소화했다.
그럼에도 오언의 공장은 높은 이윤을 창출했다. 그런 생산성 덕에 오언은 유명인이 되었고, 오언의 공장은 해외 귀족과 자본가도 참관하러 오는 명소가 되었다. 훗날, 이런 성공 경험을 토대로 오언은 나라 전체에 8시간 근무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원하는 만큼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오언은 공장법, 지금으로 치면 근로기준법이 영국에 도입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오언은 '행복한 직장'이 좋은 삶과 생산성에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유론'의 저자로 잘 알려진 공리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도 행복한 직장을 만드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여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는 재산이 없어서 누군가에게 고용되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최대 다수가 행복하려면, 노동자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밀은 노동자가 일방적으로 명령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며 일할 수 있는 기업, 즉 노동자들의 협동조합을 미래의 대안으로 여겼다.
물론 반드시 협동조합이라는 모습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위계적인 기업 중에서도 근무시간 단축과 높은 월급, 여러가지 직원 복지제도를 실현한 사례는 많다. 대표적인 곳이 독일의 지멘스와 미국의 포드다. 지멘스는 독일 정부보다 먼저 직장인을 위한 연금과 의료보험을 도입했고, 포드는 8시간 근무제를 최초로 실현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한양행이나 포스코 등이 일하는 사람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 다이소도 파트사원에게 월급 외에 추가로 점심값을 지급하고 있다.
단지 그런 기업이 너무 귀하다는 점이 문제다.
많은 사람이 월급 하나로 너무 많은 고통을 정당화하려 한다. 월급을 주는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된다는 듯이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 고용되는 입장이면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불필요한 고통을 함께 지탱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리가 다니는 직장은 정말 최선의 모습일까. 내가 직장에서 겪는 고통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취업에 대한 열망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우리나라에는 이 질문이 가장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