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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 사무라이 화가

vs 오즈 야스지로

by 새까치

1. 형 헤이고, 운명의 나침반

구로사와 아키라는 1910년 3월 23일 도쿄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일본은 메이지 시대(1868-1912)가 저물어가고 있었었죠. 그의 가족은 비교적 부유했으며, 아버지 이사무(1864-1948)는 아키타현의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육군 체육 교육소의 중등학교 교장을 역임했어요. 어머니 시마(1870-1952)는 오사카의 상인 가문 출신이었죠. 구로사와는 8남매 중 막내로, 이미 죽거나 독립한 형제자매를 제외하고 그는 세 명의 누나와 한 명의 형 헤이고와 함께 자랐습니다.


헤이고는 구로사와보다 4살 연상으로, 그의 예술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습니다. 헤이고는 1920년대 무성영화 해설자('벤시')로 활동하며, 구로사와에게 영화, 연극, 서커스 공연을 소개했습니다. 벤시는 단순히 영화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등장인물의 감정과 극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예술가였죠. 헤이고는 또한 구로사와에게 서양 문학, 특히 셰익스피어,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작품을 소개하며 그의 세계관을 넓혔습니다. 구로사와는 후일 이렇게 회상했죠.


헤이고 형은 나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줬다.
그는 내게 셰익스피어와
러시아 문학을 읽게 했다.

1920년대 말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벤시의 시대는 쇠퇴하기 시작했죠. 헤이고는 직업적 어려움과 정신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33년 7월 자살로 생을 마감했어요. 이후 4개월 뒤, 구로사와의 큰형도 뇌출혈로 사망하여, 구로사와는 23세에 유일한 남자 형제가 됩니다. 헤이고의 자살은 구로사와에게 깊은 상실감을 남겼으며, 그는 후일 이렇게 말하죠.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며,
동시에 나를
가장 큰 어둠에 빠뜨린 사람.


헤이고의 자살은 구로사와의 예술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영화는 종종 인간의 내적 갈등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며, 이는 형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상실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7인의 사무라이>에서 보이는 희생과 명예, 란에서 드러나는 비극적 운명은 이러한 주제를 반영한다.



2. 예술가의 탄생과 성장

1936년, 26살의 청년 구로사와는 PCL(후일의 토호영화사)에서 조감독으로 첫발을 내딛습니다. 카지로 야마모토 감독 밑에서 영화 제작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1941년까지 17편의 영화에 조감독으로 참여하며 실력을 쌓아갔죠. 하지만 이 시기는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을 걷던 때였습니다. 영화계 역시 전쟁을 지지하는 내용을 다뤄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죠. 구로사와도 이런 작품들에 참여해야 했지만, 그만의 예술적 비전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조감독 시절에도 꾸준히 개인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는 겁니다. 1937년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우셔 가문의 몰락]에서 영감을 받아 <팔 무덤의 마을>이라는 단편을 썼어요. 일본 마을을 배경으로 공포와 초자연적 요소를 다룬 이 작품은 서양 문학과 일본적 정서를 절묘하게 융합했습니다.


1940년에는 영국과 중국의 아편 전쟁을 다룬 시나리오 <아편 전쟁>도 작성했습니다. 아쉽게도 검열 문제로 영화화되진 못했지만, 서양 역사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죠.


마침내 1943년, 구로사와는 첫 감독작 <산시로 스가타>로 데뷔합니다.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유도 선수의 성장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그동안 쌓아온 실력과 창작 세계가 만난 결실이었습니다. 비록 군국주의 검열로 18분가량이 잘려나가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이 작품으로 그는 감독으로서의 첫걸음을 성공적으로 내디뎠죠.



3. 셰익스피어와의 운명적 만남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보편적 주제, 특히 권력과 인간의 갈등을 깊이 탐구했죠. 그는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일본의 사무라이 시대와 연결하여 재해석했으며, 이는 그의 영화에 독특한 문화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셰익스피어의 주제를 일본적 맥락에서 표현했어요.


권력을 갈망하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일본의 사무라이 시대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거미집의 성>(1957)
'맥베스'를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와시즈라는 인물이 숲 속 정령의 예언에 이끌려 야망의 길을 걷게 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재미있는 건 구로사와가 여기에 일본 전통 예술인 노(能) 연극의 요소를 녹여냈죠. 가면을 쓴 배우들의 스타일리시한 동작, 초자연적인 분위기. 이런 노 연극의 특징들이 영화 속에서 독특한 미학으로 재탄생했죠.
<란>(1985)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 전국시대로 옮긴 <란>. 이 작품에서 그가 보여준 색채 감각은 정말 놀랍습니다. 각 군대의 깃발을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으로 구분해 권력의 허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했거든요. 전투 장면에서 이 선명한 색상들이 부딪히는 모습은, 마치 캔버스 위에서 춤추는 물감처럼 아름답고도 강렬하게 펼쳐집니다.


구로사와는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단순히 각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 전통 예술을 통해 새로운 예술 형식을 창조합니다. 예를 들어, <거미집의 성>에서 악령의 모습은 노 연극의 가면을 연상시키죠.


셰익스피어는 나의 영화적 출발점입니다.
그는 인간에 대해 알고 있었죠.
나는 단지 그를 일본에 데려왔을 뿐입니다.


셰익스피어가 대사와 언어의 리듬으로 권력의 허상을 표현했다면,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연과 날씨, 색채 같은 시각적 요소를 통해 이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거미집의 성>에서 초반 안개 낀 숲 속 장면은 자연의 신비로운 힘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듯한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합니다.



4. 세계를 사로잡은 사무라이


구로사와가 <라쇼몽>(1950)으로 1951년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을 거머쥐었을 때, 세계 영화계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한 살인 사건을 네 가지 다른 시각으로 풀어낸 이 영화는,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깊은 질문을 던졌죠. 강도, 피해자의 아내, 죽은 남편의 혼령, 목격자... 각자가 주장하는 '진실'은 모두 달랐고, 결국 완벽한 진실은 없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단, 이 영화가 제작된 시점 제2차 세계대전 직후라는 사실을 잘 봐야 합니다..) 다중 시점 구조, 플래시백을 활용한 이야기 전개, 진실의 모호성을 다루는 방식 등은 수많은 현대 영화들에서 차용되죠. 이런 혁신적인 서사 구조는 나중에 '라쇼몽 효과'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냈습니다.


<7인의 사무라이>(1954)는 구로사와의 명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모인 일곱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희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죠. 특히 구로사와는 각 사무라이의 개성을 뚜렷하게 그려내면서도, 이들이 하나의 팀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했습니다.


이 작품은 후에 할리우드에서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될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존 스터지스 감독의 <황야의 7인>은 구로사와의 원작을 서부극으로 재해석했고, 이는 다시 새로운 고전이 되었죠. 이를 통해 구로사와의 영화가 가진 보편성과 매력이 입증되었습니다.


구로사와의 영향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은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고, 그의 카메라 워크와 편집 기술은 수많은 할리우드 감독들에게 영감이 되었죠. 서구 영화계의 거장들은 공개적으로 구로사와를 자신들의 스승이라 칭했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구로사와는 일본 내에서 점차 비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평론가들은 그의 영화가 "서양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죠. 큰 제작비와 서구적 이야기 방식은 일본 영화계의 주류와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후일 구로사와가 깊은 시련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죠.



5. 절망에서 피어난 르네상스

1970년, 구로사와는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을 시작합니다. 도시 빈민가의 이야기를 다룬 <도데스카덴>은 그의 첫 컬러 영화였죠. 평소의 사무라이 영화와는 전혀 다른, 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 구로사와는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특히 그는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과 꿈, 그들의 작은 희망을 섬세하게 그려내려 했죠.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영화는 흥행에서 완전히 실패했고, 제작비도 건지지 못했죠. 관객들은 구로사와의 새로운 시도를 이해하지 못했고, 평론가들의 반응도 차가웠습니다. "더 이상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감독"이라는 혹평까지 나왔죠. 일본 영화계는 그를 완전히 외면했고, 더 이상 어떤 제작사도 그의 영화에 투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일본 영화계의 자존심이었던 그는 이제 '시대에 뒤처진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죠.


깊어가는 고립감과 우울 속에서, 1971년 12월, 구로사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자택 욕실에서 자신의 목과 손목을 그었죠. 다행히 가족들이 빨리 발견해 목숨을 건졌지만, 이 사건은 그의 예술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60대 초반, 세계적 거장이라는 명성도 그를 절망에서 구해주지는 못했죠.

하지만 뜻밖의 곳에서 희망이 찾아옵니다. 소련의 모스필름이 그에게 작품 제안을 해온 것이죠.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웅 영화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시작된 것이 <데르수 우잘라>(1975) 입니다. 시베리아의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원주민 사냥꾼 데르수와 러시아 탐험대장의 우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구로사와는 이 영화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 문명과 원시의 대비를 섬세하게 포착했죠. 2년에 걸친 고된 촬영 끝에 완성된 이 작품은 1976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구로사와의 예술적 부활을 알렸습니다. 구로사와에게 <데르수 우잘라>는 단순한 영화 한 편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구로사와가 예술가로서의 자신감을 되찾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해 준 작품이었죠.



6. 할리우드의 구원자들

1970년대 후반, 구로사와의 예술적 부활은 뜻밖의 곳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그의 오랜 팬이었던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나선 것이죠. '스타워즈'와 '죠스'로 할리우드의 새로운 황금기를 이끌던 두 젊은 감독은 자신들의 영화적 스승을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감독은 20세기 폭스사를 직접 설득해 <카게무샤>(1980)의 제작비를 지원받아냈죠. 이는 단순한 투자가 아닌, 세대를 뛰어넘는 예술적 연대였습니다. 할리우드의 새로운 세대가 옛 거장에게 바치는 경의이자, 영화 예술에 대한 그들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순간이었죠.


<카게무샤>는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야심작이었습니다. 한 영주의 대역을 맡게 된 도둑의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과 권력의 본질을 탐구했죠. 평범한 도둑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면서 겪게 되는 내적 갈등,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권력의 허상은 구로사와 특유의 깊이 있는 시선으로 그려졌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구로사와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웅장한 전투 장면과 섬세한 심리 묘사를 완벽하게 조화시켰습니다. 수천 명의 엑스트라가 등장하는 전투 장면은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했고, 주인공의 미묘한 감정 변화는 긴 침묵과 표정만으로도 강렬하게 전달되었죠.

영화는 1980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제 구로사와는 더 이상 '잊혀진 거장'이 아니었죠. 할리우드의 젊은 세대가 보여준 존경과 지원은 그를 세계 영화계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일본 영화계도 그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한때 '너무 서구적'이라고 비판받던 그의 영화는 이제 일본 영화의 자부심으로 재평가받게 되었습니다. 구로사와의 영향력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었죠.


이제 구로사와는 마지막 걸작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평생 동안 꿈꿔왔던 프로젝트,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 전국시대로 옮긴 '란'의 제작이 시작된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위대한 마지막 걸작의 탄생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 <란> 최후의 걸작

1985년, 구로사와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작품을 마침내 선보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일본 전국시대로 옮긴 <란>이었죠. 이 영화는 그의 예술 인생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란>의 제작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대서사시였습니다. 구로사와는 이 작품을 위해 10년 동안 준비했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그림을 그리며 영화의 모든 장면을 스토리보드로 완성했고, 배우들의 의상도 직접 디자인했죠. 1,400벌이 넘는 갑옷과 의상이 이 영화를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습니다.


영화는 늙은 영주가 세 아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면서 시작됩니다. '리어왕'에서 세 딸이었던 것을 세 아들로 바꾼 것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을 반영한 선택이었죠. 구로사와는 이 작품을 통해 권력의 허상과 인간의 비극을 장대하게 그려냈습니다.

특히 화려한 색채의 활용이 돋보입니다. 각 군대를 상징하는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의 깃발들이 전장을 수놓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되었죠. 색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또 하나의 언어로 역할을 하죠. 영화의 모든 시각적 요소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의 절정은 성이 불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위해 구로사와는 실제 크기의 성을 지어 불태웠죠. 노년의 영주가 불타는 성 앞에서 광기에 빠지는 모습은, 인간의 오만과 그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장면을 찍기 위해 스태프들은 한 번의 기회밖에 없었고,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했습니다.


형의 죽음 이후 평생 그를 사로잡았던 주제들 - 인간의 나약함, 권력의 허상, 가족의 비극 - 이 모두가 이 작품 속에 녹아있었죠. 더불어 그의 기술적 완성도도 정점에 달했습니다. 웅장한 전투 장면, 자연과 인간의 대비, 섬세한 심리 묘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영화 <란>은 그의 영화 인생을 총정리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구로사와는 이 영화를 위해 실제 중세 일본의 전투를 연구했고, 당시의 전술과 무기, 진형 등을 완벽하게 재현하려 했습니다. 5,000명이 넘는 엑스트라가 동원되었고, 말 200마리도 전투 장면에 참여했죠.


또한 음악도 특별했습니다. 구로사와는 일본 전통 음악과 서양 교향악을 절묘하게 조화시켰습니다. 특히 일본의 전통 타악기 '타이코'와 서양 오케스트라의 결합은 전투 장면의 긴장감을 극대화했죠. 영화음악의 거장 다케미츠 도루는 이 작품을 위해 1년 넘게 작곡에 매달렸다고 합니다.

의상과 분장에도 엄청난 공을 들였습니다. 주인공 히데토라의 분장은 매일 4시간이 걸렸고, 칼라 필름의 특성을 고려해 특별한 메이크업 기법이 개발되었죠. 구로사와는 각 등장인물의 의상 색깔까지 직접 결정했는데, 이는 단순한 미적 선택이 아닌 캐릭터의 성격과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8. 화가 구로사와 아키라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구로사와는 초등학교 시절 타치카와 선생님을 만나면서 더욱 미술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도쇼이샤 서양화 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고, 18살이던 1928년에는 첫 전시회까지 열었죠. 당시 그는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연맹에도 가입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캔버스에 담으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36년, 26살의 나이로 영화계에 입문하면서 놀라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그렸던 모든 그림을 불태워버린 거죠. "화가를 잊기 위해 모든 그림을 불태웠다"는 그의 회고는, 영화라는 새로운 예술 세계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영화감독이 된 후에도 그림에 대한 애정은 계속됐다는 점입니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는 영화 스토리보드를 직접 그리기 시작했어요. 《카게무샤》(1980), 《란》(1985), 《꿈》(1990), 《마다다요》(1993) 같은 후기 작품들의 스토리보드를 보면 수채화, 잉크, 파스텔, 구아슈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그의 예술적 감각이 돋보입니다.


말년에는 화가로서도 다시 주목받았는데요, 1994년에는 뉴욕에서 40점의 그림을 선보였고, 2008-2009년에는 파리 프티 팔레에서 87점의 작품으로 회고전을 갖기도 했습니다.


내 목적은 잘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손에 닿는 다양한 재료들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9. 에필로그: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구로사와의 삶은 한 편의 장대한 영화 같았습니다. 형 헤이고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시작된 그의 예술 여정은 수많은 시련과 영광을 거쳐 <란>이라는 최후의 걸작으로 완성되었죠.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 깊은 인간 이해, 완벽을 향한 집념까지... 그의 영화 인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위대한 서사시였습니다.

1998년 9월 6일, 구로사와 아키라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30편의 영화를 남긴 그는, 지금까지도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죠. 구로사와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권력과 인간성의 대립, 개인과 사회의 갈등, 진실의 모호함과 같은 주제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죠. <7인의 사무라이>는 수많은 모험 영화의 원형이 되었고, <요짐보>는 서부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늘 인간이었습니다. 권력에 눈이 먼 영주, 마을을 지키는 사무라이, 가난한 도둑, 광기에 빠진 노인... 이들은 모두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었죠. 구로사와는 이들을 통해 인간의 위대함과 나약함,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그려냈습니다.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는 제 인생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감독입니다.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된 구로사와 탄생 100주년 특별전은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구로사와의 <라쇼몽>(1950)부터 유작 <마다다요>(1993)까지 24편의 작품에서 스크립터와 프로덕션 매니저로 활동했던 노가미 데루요가 방문하여 진행한 대담과 강연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특별전 덕분에 극장에서 처음으로 <란>을 감상할 수 있었고, 그 압도적인 영상미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개최하는 것이 과연 적절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듭니다. 여전히 구로사와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깊이 들여다볼수록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전 세계 영화인들이 그를 극찬하고 있지만, 몇몇 작품에서 드러나는 그의 시각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가해국임에도 불구하고 <라쇼몽>에서 보여준 변명적인 자세나, 패전국이면서도 원폭 피해국이라는 입장에서 리처드 기어라는 미국 배우를 동원해 반성을 강요하는 <8월의 광시곡>(1991)의 태도는 매우 불편한 감정을 자아냅니다. 우리에게 일본 제국은 36년간 식민지배를 했던 가해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거미집의 성>(1957)에서 아내 아사지의 손에 묻은 피는 아무리 씻으려 해도 씻어지지 않는 것처럼요.


<거미집의 성>(1957) 손에 묻은 피


그럼에도 구로사와가 이룩한 영화사적 업적과 한 예술가로서의 고뇌는 분명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다행히도 봉준호, 박찬욱과 같은 세계적 거장들이 있어 감사한 마음이며, 앞으로도 이들의 뛰어넘는 새로운 세대의 영화인들이 더 많이 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헌정 영상

https://youtu.be/ErelcWcNelQ?si=6v5HqrrCwTsynMVn


구로사와에게 명예 오스카상을 수여합

* 1990년 명예 오스카상 수상 장면.
(당시 일본 문화의 위상과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한 할리우드 감독들 내의 위상을 잘 알 수 있다.)

https://youtu.be/MTs5AVcArMs?si=57_2h7D4erNJpWCG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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