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구로사와 아키라
안녕하세요.
오늘은 오즈 야스지로(1903~1963) 감독 시간입니다.
오즈는 씨네필들에게 몹시 소중한 존재고, 국내외 매년 오즈 학회가 진행될 정도로 인기가 많은 감독입니다. 전 세계에 오즈 전문가들이 워낙 많아 그에 대해 얘기하는 게 몹시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거장 vs 거장] 두 번째 프로젝트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함께 오즈를 모셨습니다.
고백하자면, 오즈 야스지로 감독님은 제가 대학생 시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감독님입니다. 주변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오즈 영화를 보고 예찬할 때, 저는 이해하지 못했고, 그 시간에 전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를 보면서 흥분하고 그랬습니다.
20대 후반 영화 아카데미를 들어가서 뒤늦게 정성일 선생님 시간에 오즈 야스지로 영화를 한 두 편씩 보기 시작했고, 뒤늦게 오즈의 미학에 푹 빠졌습니다. 늦깎이 사랑이 무서운 것처럼 전 오즈의 호흡에 빠져서 허우샤오시엔에 이어 지아 장커 감독까지 한동안 헤어 나오질 못했었죠. 최근엔 의식적으로 조금 멀리 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요즘 현실이 힘들어서 인지 이토록 심심한 오즈 야스지로 감독님의 영화가 문뜩 생각나고, 새벽에 아이들을 재워놓고 소파에 앉아 한편씩 보고 자고 합니다. 이제 함께, 오즈의 세계로 빠져보시죠.
주요 작품
- 동경 이야기 (東京物語, 1953)
- 만춘 (晩春, 1949)
- 부초 (浮草, 1959)
- 꽁치의 맛 (秋刀魚の味, 1962)
메이지 36년, 1903년 12월 12일. 도쿄 후쿠가와 구의 작은 집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토라노스케는 도쿄에서 비료 도매상을 운영했습니다. 오즈가 태어난 메이지 시대는 일본 역사상 가장 격변기였습니다.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죠. 이 시기 일본은 수백 년의 쇄국정책을 끝내고 근대화의 물결을 타며 조선을 짓밟고 대륙으로 뻗어나갔죠. 일본 내 거리에는 인력거와 전차가 뒤섞여 달렸고, 기모노 차림 사이로 양복을 입은 신사들이 오갔습니다. 특히 영화는 메이지 시대의 새로운 문화를 대표하는 매체였습니다.
오즈는 1913년, 10세 때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미에현 마츠사카로 이주해서 19세까지 이곳에서 보냅니다. 오즈는 12세에 미에현립 다이욘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으며, 유도를 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영화 잡지를 읽거나 졸기 일쑤였죠. 교사들은 그를 '불량학생'으로 여겼지만, 사실 오즈는 그저 영화 세계에 빠져있었습니다. 오즈는 수업을 빠지고 마츠사카의 아타고자와 미노자 영화관으로 자주 영화를 보러 다녔죠.
무성영화 시대, 도쿄의 영화관들은 젊은 오즈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윌리엄 S. 하트의 서부극은 그의 최애 장르였죠. <만춘>(1949)에서 하트를 언급할 정도로 그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청년 오즈가 동경했던 할리우드 영화와 그가 나중에 만든 작품들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영화광 소년은 점차 영화계로의 진출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는 그가 교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오즈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죠. 마침내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는 영화사 입사를 선언합니다.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즈의 결심은 확고했죠.
1923년 여름, 스무 살의 오즈 야스지로는 쇼치쿠에서 영화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처음 맡은 일은 영화와는 거리가 먼 잡무였습니다. 스튜디오 청소부터 도시락 심부름까지,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았죠.
당시 쇼치쿠는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사였습니다. 특히 가마타 스튜디오는 시대극보다는 현대극 제작에 주력했고, 서구의 새로운 영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던 곳이었죠. 이곳에서 오즈는 영화 제작의 기초를 배우게 됩니다.
스튜디오의 일과는 고됐습니다. 오즈의 첫 월급은 고작 13엔. 당시 도쿄에서 라멘 한 그릇이 15전이었으니, 한 달 월급으로 라멘 약 80그릇을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죠. 하지만 그는 스튜디오에서 잠을 자기도 하면서 영화 만드는 현장을 지켜봤습니다.
가마타 스튜디오에서 오즈가 처음 맡은 '진짜' 영화 일은 카메라 조수였습니다. 당시 일본 영화계는 할리우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시기였습니다. 오즈는 미국 영화를 연구하며 카메라 기술을 익혔고, 점차 각본 작성도 배우기 시작했죠.
1926년, 드디어 조감독으로 승진한 오즈는 자신만의 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7년, 24살의 나이로 첫 연출작 <참회의 칼>을 내놓았습니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코미디였죠. 현재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평단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초기의 오즈는 미국식 코미디를 만드는 감독이었습니다.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의 초기작들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성격이 강했죠. 하지만 이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29년 오즈의 <학생 로망스 젊은 날>은 그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화로, 오즈의 초기 스타일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코미디이면서도 청춘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 이후 오즈는 점차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으며 일본적인 정서와 현실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죠.
1930년대 초반, 오즈는 본격적으로 실험을 거듭합니다. 카메라 위치를 점점 낮추기 시작했고, 이는 후에 '다다미 쇼트'라고 불리는 그만의 독특한 촬영 스타일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할리우드식의 빠른 편집 대신, 차분하고 정적인 리듬을 추구하기 시작했죠.
이 시기 오즈는 촬영감독 아츠타 유하루와 만납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일본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감독과 촬영감독의 콤비를 탄생시켰죠. 아츠타는 오즈의 완벽주의적인 연출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1936년 <외아들>로 오즈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첫 유성영화였으며, 오즈가 일본의 현실을 더욱 섬세하게 담아내는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면모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오즈는 단순한 코미디 감독이라는 이미지를 넘어서, 일본 사회와 가족의 모습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감독으로 더욱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일상을 찍고 싶었던 오즈에게, 시대는 점점 더 가혹한 현실을 들이밀고 있었죠.
군국주의의 물결이 일본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영화계도 전시 체제로 재편되었죠. 정부는 전쟁 선전 영화를 강요했지만, 오즈는 끝까지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고수했습니다.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서도 오즈는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1941)과 같은 가족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전쟁 영웅이나 애국심 대신, 평범한 가정의 일상을 담아낸 것이죠. 하지만 이런 저항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1943년, 마침내 그도 군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40살의 나이였죠. 오즈는 중국 난징 근처에 주둔하며 군수품 관리를 맡았습니다. 전장의 한복판은 아니었지만,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전쟁 중에도 오즈는 틈틈이 영화 구상을 했습니다. 배급받은 쌀을 담던 종이 뒷면에 시나리오를 썼고, 허름한 막사에서 새로운 촬영 기법을 구상했죠. 전쟁터에서도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소식은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서 그를 찾아왔습니다. 제국의 몰락과 함께 오즈가 알던 일본도 끝나가고 있었죠. 전후 일본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있었습니다.
1946년 봄, 도쿄로 돌아온 오즈가 마주한 것은 폐허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카메라를 다시 들었습니다. 전쟁 이전의 화려한 기교는 사라졌고, 대신 더욱 깊어진 인간에 대한 통찰이 그의 영화를 채우기 시작했죠.
패전 후 첫 작품인 <만춘>(1949)은 일본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화려한 장면도, 극적인 전개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버지와 딸의 조용한 이별을 그린 작품이었죠. 하지만 그 안에는 전쟁이 끝난 일본의 모든 상실과 희망이 담겨있었습니다.
전쟁은 오즈에게서 6년이라는 시간을 앗아갔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간은 그의 예술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었습니다. 전쟁 전의 오즈가 기교를 추구했다면, 전쟁 후의 오즈는 본질을 찾아갔죠.
이제 그의 카메라는 더욱 낮게, 더욱 고요하게 일본의 일상을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상처를 안은 채,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후기 오즈 영화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전후 일본의 모습은 급격하게 변화했습니다. 미군 점령기(1945~1952)를 거치며 일본은 민주화와 서구화의 물결을 맞이했죠. 이 시기에 오즈는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문법을 완성해 갔습니다.
오즈의 카메라는 점점 더 낮아졌습니다. 다다미방에 앉은 사람의 눈높이, 그러니까 바닥에서 약 50센티미터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죠. '다다미 쇼트'라 불리게 된 이 독특한 카메라 워크는 오즈 영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영화의 기본 문법도 과감히 파괴했습니다. 대화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어긋나게 찍는 '시선 불일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죠. 또한 대화 장면 사이에 빈 공간을 보여주는 '필로우 쇼트'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복도, 하늘, 빨래... 언뜻 보면 불필요해 보이는 이 장면들이 오즈만의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냈습니다.
<만춘>(1949)은 전후 오즈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작품이었습니다. 27살의 노리코(하라 세츠코)와 그의 아버지 쇼키치의 이야기를 담았죠. 전쟁 후 단둘이 살아가는 부녀. 딸의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는 복잡한 심정을 감춰야 했습니다. 이 작품은 감독의 성숙기 작품의 시작으로 여겨지며,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와 가족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즈의 후기 스타일은 <동경 이야기>(1953)에서 정점에 달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의 모든 영화적 요소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정적인 카메라, 절제된 연기, 여백의 미학이 만들어낸 이 걸작은 후에 '영화의 성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1958년, 오즈는 처음으로 컬러 영화 <피안화>를 연출했습니다.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환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즈는 여기서도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했죠. 화려한 색채 대신 절제된 톤을 선택했고, 이는 그의 마지막 작품까지 이어졌습니다.
마지막 작품 <꽁치의 맛>(1962)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스타일이 완벽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작품에서 오즈의 카메라는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관조적이었습니다. 마치 일본 정원의 돌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의 카메라는 오히려 더 깊은 감동을 전달했죠.
오즈의 영화에는 화려한 카메라 워크도, 극적인 전개도 없었습니다. 대신 일상의 순간들을 정직하게 담아냈죠. 그의 스타일은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마치 선불교의 수행자처럼, 그는 영화에서 본질만을 남기고자 했습니다.
오즈의 가족 영화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식사 장면이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거의 모든 중요한 대화가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지죠. 이는 일본의 전통적 가족 문화를 상징합니다.
또한 결혼은 늘 이중적 의미를 가집니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자, 동시에 기존 가족의 해체를 의미하죠. 특히 딸의 결혼은 오즈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으로 그려집니다.
마지막으로, 세대 간의 단절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점점 멀어져 갑니다. 이는 급격한 현대화를 겪은 일본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했죠.
오즈의 영화에서 특별한 사건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살인도, 폭력도, 격렬한 감정의 폭발도 없죠. 대신 차를 마시는 순간, 빨래를 개는 모습, 복도를 걸어가는 발소리와 같은 소소한 일상이 화면을 채웁니다.
전후 일본 영화계에서는 구로사와 아키라처럼 웅장한 서사와 드라마를 추구하는 감독들이 주목받았습니다. 반면 오즈는 점점 더 작은 것들에 집중했죠. 그의 카메라는 가족의 일상적인 순간들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동경 이야기>(1953)의 한 장면을 보면, 노부부가 도쿄 타워를 바라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오즈는 도쿄 타워 대신 노부부의 뒷모습만을 오래도록 비춥니다. 거대한 도시의 상징물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더 관심이 있었던 거죠.
오즈 영화에서 계절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봄의 벚꽃, 여름의 매미 소리, 가을의 단풍, 겨울의 눈... 이러한 자연의 변화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대변합니다. <만춘>(1949)에서 벚꽃이 지는 장면은 단순한 풍경이 아닌, 아버지의 상실감을 표현하는 은유가 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비어있는 공간'의 활용입니다. 오즈는 종종 인물이 없는 빈 방, 텅 빈 복도, 움직임 없는 정원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여백'은 일본 전통 예술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오즈는 이를 영화적 언어로 승화시켰습니다.
소리의 활용도 독특합니다. 멀리서 들리는 기차 소리, 시계 초침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 소리... 이런 일상적인 소리들이 오즈 영화의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동경 이야기>(1953)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정적은 그 어떤 대사보다 강렬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꽁치의 맛>(1962)의 한 장면에서는 술에 취한 아버지가 딸의 결혼을 걱정하며 혼자 중얼거립니다. 카메라는 그저 멀리서 지켜볼 뿐입니다. 감정을 과장하거나 강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담담한 시선 속에서 아버지의 걱정과 사랑이 더욱 진하게 전해집니다.
오즈는 술을 사랑했습니다. 긴자의 술집에서는 주로 사케를 즐겼지만, 스카치 위스키도 좋아했습니다. 여관이나 숙소에서도 공동 작가인 노다 코고와 함께 작업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술을 마셨습니다. 오즈는 종종 작업 과정에서 마신 술병의 수를 세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경 이야기> 작업을 마치고 “103일 동안 43병의 사케를 마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오즈는 술이 자신의 예술적 힘의 원천이라고 믿었습니다.
술잔의 수가 적으면 걸작이 나올 수 없다.
오즈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머니 아사에와 함께 살았죠. "나는 영화와 결혼했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모든 시간과 열정을 영화에 바쳤습니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그는 새벽부터 일어나 시나리오를 썼고, 밤에는 술을 마시며 다음 작품을 구상했습니다.
촬영 현장의 오즈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단순한 복도 장면 하나를 찍는 데도 수십 번의 테이크를 요구했죠. 하지만 그의 고집은 단순한 까다로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카메라로 포착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순간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1962년, 어머니의 죽음은 오즈에게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어머니를 잃은 후, 그의 고독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꽁치의 맛>(1962)은 이러한 상실감이 깊이 배어있는 작품이었죠.
오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습니다. "영화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했죠. 그래서인지 그의 인터뷰는 드물고, 남긴 글도 많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작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년의 오즈는 점점 더 고독해졌습니다. 술자리가 늘어났고, 건강은 악화되었죠. 하지만 그는 끝까지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마지막 작품 <꽁치의 맛>(1962)을 완성한 후, 그는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1963년 12월 12일, 자신의 60번째 생일에 오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자신의 묘비에 새길 글자로 '무(無)'를 택했습니다. 그의 영화처럼 단순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은 선택이었죠.
오즈가 남긴 작품은 54편. 그중 현존하는 것은 36편에 불과합니다. 전쟁 중 많은 필름이 소실되었고, 초기 무성영화들은 대부분 사라졌죠. 하지만 남은 작품들은 세계 영화사의 귀중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1963년 <꽁치의 맛>을 마지막으로 오즈는 카메라를 내려놓았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모든 영화적 특징을 완벽하게 담아낸 걸작이었죠. 결혼을 앞둔 딸, 그녀를 보내야 하는 아버지, 변해가는 도쿄의 모습... 마치 오즈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정리하듯 모든 것을 이 영화에 담았습니다.
놀랍게도 오즈의 진정한 가치는 사후에 서구 세계에서 먼저 인정받았습니다. 197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의 평론가들은 오즈를 '영화의 성인(聖人)'으로 추켜세웠죠. 폴 슈레이더는 "오즈의 영화는 선(禪)의 미학을 완벽하게 구현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현대 영화에 미친 오즈의 영향력은 실로 놀랍습니다. 웨스 앤더슨은 오즈의 대칭 구도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발전시켰고, 짐 자무시는 '침묵의 순간'을 오즈에게서 배웠다고 말합니다.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홍콩의 왕가위, 이란의 키아로스타미, 핀란드의 아키 카우리스마키까지, 세계 각국의 감독들이 오즈를 자신들의 스승으로 꼽았습니다.
오즈가 남긴 유산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영화 문법의 혁신. 로우 앵글 쇼트, 필로우 쇼트, 시선 맞추기의 파괴와 같은 그의 기법들은 현대 영화의 중요한 표현 수단이 되었습니다.
둘째, 일상의 미학화. 평범한 순간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오즈의 방식은 현대 영화의 한 조류를 형성했습니다. 특히 아시아 영화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셋째, 가족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 오즈는 가족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통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감동을 전달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오즈의 카메라가 포착한 일상의 순간들은 영원한 예술이 되어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오즈가 임종 직전 요시다 감독에게 한 마지막 말은 그의 영화와 일생 모두를 집약하는 문장입니다.
映画は事故ではなく、ドラマだ。
영화는 사고(accident)가 아니라 드라마다.
오즈는 떠났습니다. 그동안 영화는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었고, 스마트폰으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즈의 영화가 전하는 감동은 전혀 퇴색되지 않았습니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숏츠는 우리의 일상을 순간의 연속으로 쪼개놓았고, 넷플릭스의 시대에는 뭔가 계속 일어나야만 재미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즈의 영화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오늘날 우리에게 오즈가 주는 가장 큰 가르침은 '멈춤'의 미학일 것입니다. 잠시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둘러보고, 가족의 얼굴을 바라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격변하는 시대를 살았던 오즈는, 변하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아침 식탁에서 마주 보는 가족의 얼굴, 퇴근길에 마시는 차 한 잔, 창가에 비치는 석양... 이런 순간들이 우리의 인생을 만듭니다. 오즈는 이 평범한 진실을 가장 아름답게 포착한 예술가였습니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무(無)'라는 글자는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덜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오즈의 대답은 명확했습니다. 가족이 남고, 일상이 남고, 인생이 남는다는 것이었죠.
때로는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침묵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것. 그것이 오즈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마지막 수업일지도 모릅니다.
- 끝
なんでもないことは流行に従い、
重大なことは道徳に従う。
芸術のことは自分に従う。
사소한 것은 유행을 따르고,
중요한 것은 도덕을 따르며,
예술은 자신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