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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 키튼 - 위대한 광대

vs 찰리 채플린

by 새까치

<거장 vs 거장> 제1화. 버스터 키튼


무성영화 시대의 천재, 버스터 키튼(1895~1966)을 소개합니다. 'The Great Stone Face'라는 별명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세상의 모든 위험과 맞서던 그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전 오랫동안 찰리 채플린만 알았습니다. 영화학교에서도 채플린을 주로 다뤘죠. 하지만 지난 회사 동료의 강력한 추천으로 키튼을 만난 후, 제 삶은 달라졌습니다. 우울하고 지친 날, 그의 영화는 마법처럼 제 마음을 치유했습니다.


키튼의 매력은 독특합니다. 아무리 황당한 상황에서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무표정, 그러면서도 완벽한 타이밍의 물리적 코미디. 기차, 폭풍, 집이 무너지는 재난 속에서도 담담하게 살아남는 그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별한 위로가 됩니다.


다행히도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복원되어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지친 마음을 위로할 준비를 마친 채 키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세계로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1. 천막 아래 태어난 아이
: 서커스가 운명이 된 코미디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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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 키튼 어린시절 1900년도 경

1895년 10월 4일, 한 아기가 캔자스 주의 작은 서커스 천막에서 태어났습니다. 병원도, 집도 아닌 곳이었죠. 공연이 한창이던 그날, 어머니는 진통이 시작되자마자 무대로 뛰어나가야 했고, 공연이 끝난 직후 천막 뒤에서 조지프 프랭크 키튼이라는 이름의 아기가 첫울음을 터뜨렸습니다.


19세기 말의 미국은 격변기였습니다. 서부 개척 시대가 저물고 산업화의 물결이 몰아치던 때, 사람들은 새로운 오락거리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전기가 도시를 밝히기 시작했고 자동차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가장 큰 즐거움은 서커스와 보드빌이었습니다. 보드빌은 노래, 춤, 코미디가 어우러진 버라이어티 쇼로, 전국을 순회하며 도시와 마을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키튼의 부모는 '더 쓰리 키튼스'라는 공연 팀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아버지 조 키튼은 거칠지만 재미있는 코미디로, 어머니 마이라는 아름다운 악기 연주로 유명했죠. 이들은 미국 전역을 떠돌며 공연했는데, 그러다 전설적인 마술사 해리 후디니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됩니다.


후디니와의 만남은 키튼의 인생을 바꾸는 순간이었습니다. 18개월 된 아기 키튼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놀랍게도 울음을 터트리는 대신 무표정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를 본 후디니가 "이 꼬마 정말 터프하군!(What a buster!)"이라고 외쳤고, 그때부터 '버스터'라는 이름이 그를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버스터의 일상은 남달랐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글자를 배울 때, 그는 무대 뒤에서 관객의 웃음이 터지는 순간을 배웠습니다. 그의 놀이터는 극장이었고, 장난감은 무대 소품이었죠. 어릴 때부터 보여준 뛰어난 신체 능력은 후에 그만의 독특한 아크로바틱 코미디를 만드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서커스와 보드빌이 전성기를 누리던 그 시절, 영화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움직이는 사진이라는 신기한 발명품 정도로 여겨졌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환경이 어린 버스터에게는 최고의 학교가 되었습니다. 매일 밤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그에게 코미디의 본질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밤 관객들이 내 선생님이었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내 교과서였습니다.


후에 키튼이 남긴 이 말은 그의 특별한 어린 시절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서커스 천막 아래에서 태어난 한 아이는, 이렇게 코미디언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자라났습니다.
세기말의 혼란스러운 시대, 한 떠돌이 공연단의 아이로 태어난 버스터 키튼. 그는 태어날 때부터 광대의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릅니다. 무대 위에서 시작된 그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2. 던져진 아이, 웃는 관객
: 무대 위에서 시작된 잔혹한 코미디

u5f1xrntdfr71.jpg?auto=webp&s=f042d4b8b878378e8ed04c00eee631c86537b3ef <세 명의 키튼>(아버지, 어머니, 버스터 키튼), 보드빌 쇼를 위한 홍보 사진, 1901년

버스터 키튼이 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특별한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 이 녀석을 무대에 세울 때가 됐어." 그렇게 시작된 '키튼 가족 쇼'는 곧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죠.


공연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무대 위에서 외칩니다. "이 아이가 말썽을 부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객들이 웃으며 대답합니다. "혼내줘야죠!" 그러면 아버지는 세 살배기 버스터를 데리고 나와 무대 여기저기로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객석으로 던지기도 했고, 때로는 무대 벽에 붙였다가 떼어내기도 했죠.


놀라운 것은 버스터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던져지고,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져도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났죠. 관객들은 이런 모습에 더욱 크게 웃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청난 고난을 당하는데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었죠. 이때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무표정' 연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울면 재미없어진다는 걸 일찍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웃음도, 눈물도 없는 표정을 유지하기로 했죠.

공연은 날이 갈수록 더욱 과격해졌습니다. 아버지는 버스터를 더 높이, 더 멀리 던졌고, 더 세게 부딪혔습니다. 지금이라면 즉각 아동학대로 고발당했을 행위들이었죠.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과격한 공연이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키튼 가족 쇼'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매진 행렬을 이어갔습니다.


어린 버스터는 이 과정에서 놀라운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균형을 잡을 수 있었죠. 던져지고 구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익힌 이 능력은 후에 그의 영화에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무대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아버지 조 키튼은 알코올 중독자였고, 술에 취하면 종종 폭력적이 되었습니다. 공연에서의 '재미있는' 던지기가 실제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죠. 어머니 마이라는 이런 상황을 걱정했지만, 공연의 인기를 거부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린 버스터는 이런 상황을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켰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무표정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혼돈스러운 현실을 이겨내는 그만의 방식이었죠. 웃음도 울음도 없는 얼굴로, 그는 자신의 고통을 코미디로 바꾸어냈습니다.


무대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고통을 웃음으로 바꾸는 법'이었습니다.

키튼의 이 말은 그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이 되었습니다. 던져진 아이는 이렇게 코미디의 대가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무표정 뒤에는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3. 카메라를 사랑한 남자
: 무성영화와의 운명적인 만남

maxresdefault.jpg <The Butcher Boy> (1917)

1917년, 22살의 버스터 키튼에게 인생을 바꾸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뉴욕의 한 극장에서 공연하던 그는 우연히 로스코 '패티' 아버클이라는 코미디언을 만났습니다. 당시 아버클은 이미 무성영화계의 스타였고, 찰리 채플린 다음으로 높은 개런티를 받는 배우였죠.


보드빌 공연을 보고 반해버린 아버클은 키튼에게 영화를 함께 할 것은 제안하죠. 이렇게 극장을 찾은 키튼은 처음 보는 촬영장비들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카메라를 분해하고 조립하며 영화 촬영의 원리를 파헤치기 시작했죠. 키튼의 회고대로, 영화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무대에서는 불가능했던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카메라 앞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마법 같았습니다. 보드빌에서는 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죠.


첫 영화 <The Butcher Boy>(1917)에서 키튼은 아버클의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조연을 뛰어넘었습니다. 밀가루 자루를 들고 곡예를 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이 새로운 배우에 주목하기 시작했죠. 키튼은 이후 2년 동안 아버클과 함께 14편의 단편영화를 만들며 영화의 문법을 배워나갔습니다. 특히 키튼은 카메라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무대와 달리 영화는 여러 번 촬영이 가능했고, 편집을 통해 장면을 재구성할 수 있었죠. 그는 이런 영화의 특성을 활용해 더욱 정교한 코미디를 만들어냈습니다. 한 장면을 수십 번 반복해서 찍으며 완벽한 타이밍을 추구했고, 카메라 앵글을 연구하며 가장 웃긴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나는 영화가 단순한 연극 촬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예술이었죠.

키튼은 무성영화만의 독특한 특성을 깊이 이해했습니다. 대사 없이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을 통해 코미디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1919년, 키튼은 마침내 자신만의 제작사를 설립합니다. 아버클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첫 자체 제작 영화 <One Week>(1920)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집을 지으려다 엉망이 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에서 키튼은 자신만의 독특한 코미디 스타일을 완벽하게 보여주었죠.


"카메라는 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들어주었으니까요." 키튼의 이 말처럼, 카메라는 그에게 새로운 창조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무대 위의 광대에서 영화의 혁신가로, 키튼의 변신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4. 웃음을 설계하다

: 슬랩스틱의 과학자가 된 무표정한 천재

f32ca1ce4ecb52716db565038d23a46f.jpg <The Electric House> (1922)

1920년, 버스터 키튼은 자신만의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단편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다른 코미디언들이 즉흥적인 개그에 의존할 때, 키튼은 모든 장면을 정교하게 계산했습니다. 마치 건축가처럼 도면을 그리고, 과학자처럼 실험하며 자신만의 코미디를 설계했죠.


코미디는 수학입니다.

키튼의 이 말은 그의 작업 방식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그는 모든 장면을 종이에 그림으로 그린 뒤, 각도와 타이밍을 계산했습니다. 넘어지는 각도, 물체가 떨어지는 속도, 카메라와의 거리까지 모든 것을 수치화했죠.


찰리 채플린이 감정에 호소하는 코미디를 만들었다면, 키튼은 물리법칙에 기반한 코미디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영화에서 사고는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모든 움직임은 정확한 계산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관객들은 그가 만든 복잡한 기계장치 같은 상황 전개에 매료되었습니다. 키튼의 트레이드마크인 무표정 연기도 과학적 계산의 결과였습니다.


표정을 짓는 순간 웃음이 반감됩니다. 관객은 배우의 감정에 동조하는 게 아니라, 상황 자체의 부조리를 보고 웃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집이 무너져도, 기차가 추락해도 그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죠. 스턴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키튼은 위험한 장면을 찍기 전에 수십 번의 리허설을 거쳤습니다. 그는 낙하 속도, 충격의 강도, 착지 지점까지 모든 것을 계산했고, 그래서 대역 없이도 위험한 장면을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완벽한 계산이 있으면 위험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물리법칙을 따르니까요."


<The Playhouse>(1921)에서 키튼은 한 장면에서 자신을 아홉 명의 다른 캐릭터로 분할 촬영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기술이었죠. 그는 각 캐릭터의 동선을 초단위로 계산하고, 카메라의 위치를 밀리미터 단위로 조정했습니다. 결과는 경이로웠습니다. 관객들은 마치 아홉 명의 키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죠.


<The Electric House>(1922)에서는 자동화된 미래 주택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자동계단, 전동 식탁, 기계식 당구대 등 온갖 장치들이 등장했고, 모든 것이 실제로 작동했습니다. 키튼은 이 장치들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했습니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진짜로 작동해야 진짜 웃음이 나옵니다."


스튜디오의 엔지니어들은 키튼을 '발명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장치를 고안했고, 더 정교한 장면을 위해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때로는 한 장면을 위해 수주일을 투자하기도 했죠. 제작비는 증가했지만, 그의 완벽주의는 타협을 몰랐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건 단순한 코미디가 아닙니다. 우리는 웃음을 만드는 기계를 설계하는 거죠." 키튼의 이 말은 그의 작품 세계를 정확히 설명합니다. 그는 코미디를 하나의 정밀한 과학으로 승화시켰고, 그 결과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만들어냈습니다.



5. 불멸의 걸작들

: 죽음을 건 도전, 영화사를 바꾼 순간들

image-w1280.jpg?size=800x <Sherlock Jr.> (1924)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버스터 키튼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세 편의 걸작을 만들어냈습니다. 셜록 주니어, 제너럴, 스팀보트 빌 주니어는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영화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했고, 때로는 엄청난 제작비가 들었지만, 키튼은 자신의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걸작은 <셜록 주니어>(1924)였습니다. 영화관에서 일하는 영사기사가 탐정 영화를 보다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키튼은 실제와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혁신적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스크린 속 세상과 현실을 오가는 장면은 특수효과의 혁명이었습니다. 촬영 중 키튼은 와이어에 매달린 채 높은 곳에서 떨어지다가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이 사실을 모르고 일주일을 더 촬영했다고 합니다.
<제너럴>(1926)은 키튼의 야심작이었습니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키튼은 실제 증기기관차를 사용했습니다. "진짜 기차가 아니면 진짜 영화가 될 수 없습니다." 그의 고집대로였죠. 촬영 중 가장 위험했던 장면은 다리가 무너지면서 기차가 강으로 추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이 장면의 제작비는 42,000달러로, 무성영화 시대 최고가의 장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제너럴의 촬영은 오리건 주의 작은 마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키튼은 실제 증기기관차를 운전하는 법을 배웠고, 모든 위험한 장면을 직접 소화했습니다. 기차 지붕 위에서 뛰어다니고, 선로에 앉아 침목을 치우고, 때로는 기차 앞부분에 매달려 달리기도 했죠. 한 번의 실수도 죽음을 의미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언제나 정확했습니다.
마지막 걸작은 <스팀보트 빌 주니어>(1928)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집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3층 건물의 정면이 키튼을 향해 무너져 내리고, 그는 정확히 창문이 있는 자리에 서 있다가 무사히 빠져나옵니다. 이 장면은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촬영되었습니다. 창문의 위치가 5센티미터만 어긋났어도 키튼은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저 장면을 찍을 때 보험회사가 발칵 뒤집혔죠. 하지만 나는 내 계산을 믿었습니다." 키튼의 말처럼, 그의 모든 위험한 장면은 정확한 계산에 기반했습니다. 2톤이 넘는 건물 정면이 무너지는 순간의 각도, 속도, 바람의 영향까지 모든 것을 계산했습니다.


이 시기 키튼의 영화들은 흥행과 평단의 호평을 모두 얻었습니다. 관객들은 그의 대담한 묘기에 열광했고, 평론가들은 그의 예술성을 극찬했습니다. 특히 제너럴은 "완벽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으며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의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유성영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고, 키튼의 무성영화 시대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시기에 남긴 작품들은 영화의 고전으로 남아, 지금까지도 수많은 영화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6. 침묵에서 소리로
: 무표정한 광대의 추락

fb916c7bfb5ba1e0706bd7c156f16f8d.jpg <Free and Easy> (1930)

1929년, 할리우드는 격변기를 맞이했습니다. 화면에 소리를 입히는 기술이 등장했고, 관객들은 말하는 영화에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이 변화는 버스터 키튼에게 재앙이었습니다.


소리는 내 영화를 죽였습니다. 침묵 속에서 완성되던 코미디가 대사 때문에 망가지기 시작했죠.

변화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키튼은 MGM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당시 MGM은 할리우드 최고의 스튜디오였고, 어마어마한 계약금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계약서에는 치명적인 조항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작품을 직접 감독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MGM의 프로듀서들은 키튼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키튼에게 과장된 표정 연기를 요구했고, 유치한 대사를 강요했습니다. "웃어요, 더 크게 웃어요!" 프로듀서들의 요구는 키튼의 예술 세계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1930년 키튼의 첫 유성영화 <Free and Easy>(1930)가 개봉했습니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지만, 평론가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버스터 키튼의 영혼이 사라졌다"는 혹평이 이어졌습니다. 무표정의 광대는 이제 억지로 웃는 피에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삶도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부인 나탈리와 이혼했고, 두 아들과의 관계도 멀어졌습니다.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키튼은 술에 의지했습니다. 촬영장에 취한 채로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고, MGM은 그를 문제 배우로 낙인찍었습니다.


1933년,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MGM은 키튼과의 계약을 해지했고, 그는 파산 신청을 해야 했습니다. 한때 할리우드에서 가장 높은 주급을 받던 배우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린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술은 늘었고, 웃음은 사라졌죠.

키튼은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아야 했고, 여러 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한때 자신의 이름을 건 스튜디오를 가졌던 그가 이제는 B급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키튼은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40년, 그는 알코올 중독을 극복했고, 간호사 출신의 엘리노어 노리스와 세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엘리노어는 키튼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도움으로 키튼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침묵의 시대는 끝났지만, 내 안의 코미디언은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키튼은 작은 역할이라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때로는 TV 광고에 출연하고, 때로는 서커스에서 공연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한때 천재 감독이었던 그가 이제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습니다.


할리우드의 황금기가 저물어가던 1950년대, 무성영화 시대의 영광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키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의 재평가가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7. 잊힌 천재의 귀환

: B급 배우에서 예술가로

scncjzf8d7r61.jpg 196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은 키튼

1949년 파리, 한 영화관에서 특별한 상영회가 열렸습니다. 프랑스의 젊은 평론가들이 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들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상영관은 매일 만원이었고,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20년 전의 영화가 새로운 관객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키튼은 잊힌 천재다."


프랑스의 영화 평론가들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앙드레 바쟁은 제너럴을 "영화 예술의 완벽한 결정체"라고 극찬했습니다. 키튼의 작품들은 마치 오래된 보석처럼 다시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할리우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 TV 방송국들이 무성영화 시대의 고전들을 방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세대들이 키튼의 작품을 접했고, 그의 천재성을 재발견했습니다.


1956년,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는 키튼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인생을 다룬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영화 더 버스터 키튼 스토리가 제작되었고, 비록 실제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키튼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1959년, 키튼은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았습니다. 무대에 선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다시 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30년 만의 명예 회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키튼의 연기 인생도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라임 라이트>(1952)에 특별 출연했고, 두 무성영화의 거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크린에서 만났습니다. 비록 짧은 장면이었지만, 두 사람의 호흡은 완벽했습니다.


광고계에서도 그를 찾았습니다. 캐나다의 맥주 회사는 키튼의 이름을 건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히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1964년, 베니스 영화제는 키튼의 특별전을 개최했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영화인들이 모여들었고, 젊은 감독들은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키튼은 이제 현대 영화의 선구자로 인정받았습니다.


말년의 키튼은 바빴습니다. 여러 TV 쇼에 출연했고, 자서전을 집필했으며, 강연도 했습니다.


제 인생은 롤러코스터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제 작품을 다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

1966년 2월 1일, 키튼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캐나다의 단편영화 영화 제작자였습니다. 촬영이 끝난 후 그는 말했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요.



8. 웃음의 문법을 완성하다

: 현대 영화에 새겨진 버스터 키튼의 유산

MV5BMjEyMTQwOTEzMV5BMl5BanBnXkFtZTcwMDM0MDMzNA@@._V1_.jpg <The General> (1926)
버스터 키튼이 없었다면 현대 영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2019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입니다. 실제로 키튼의 영향력은 코미디를 넘어 현대 영화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그가 완성한 웃음의 문법은 지금도 진화하며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계승자는 성룡입니다. 성룡은 여러 인터뷰에서 키튼을 자신의 우상이라고 밝혔습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아크로바틱한 액션과 코미디의 결합은 키튼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사형도수>(1978)에서 성룡이 시계탑에 매달리는 장면은 셜록 주니어의 오마주였습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은 키튼의 무표정 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담담한 표정과 부조리한 상황의 대비는 키튼의 스타일을 계승한 것입니다. "관객을 웃게 만드는 것은 배우의 과장된 연기가 아니라, 상황 자체의 부조리함이어야 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셉션>(2010)을 만들며 키튼의 셜록 주니어를 수없이 연구했다고 합니다. 중력이 뒤틀리는 장면, 현실과 꿈이 뒤섞이는 순간들은 키튼이 이미 100년 전에 실험했던 영화적 문법이었습니다. "키튼은 이미 현대 블록버스터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코엔 형제는 키튼의 정교한 구성력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복잡한 인과관계와 우연의 연쇄는 키튼의 작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번 애프터 리딩>(2008)의 엉뚱한 전개나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2000)의 황당한 상황 전개는 모두 키튼의 영화 문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쥬라기 공원>(1993)을 연출하며 제너럴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거대한 공룡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들은 키튼이 증기기관차를 다루던 방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었습니다. "키튼은 스펙터클과 긴장감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현대 코미디언들도 키튼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로완 앳킨슨은 자신의 무표정 연기가 키튼에게서 왔다고 밝혔습니다. 짐 캐리는 키튼의 작품을 연구하며 물리적 코미디의 극한을 추구했고, 빌 머레이는 키튼의 담담한 연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코미디는 진화합니다. 하지만 웃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키튼의 이 말은 그의 유산이 왜 여전히 유효한지를 설명해줍니다. 기술은 발전하고 매체는 바뀌어도, 그가 완성한 웃음의 문법은 여전히 우리를 즐겁게 만듭니다. 영화사에서 버스터 키튼이 차지하는 위치는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코미디언이 아닌, 영화 언어를 창조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성영화 시대의 광대는 이제 현대 영화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Buster Keaton.jpg <Day Dreams> (1922)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직접 보러가시죠!


추천작품

https://youtu.be/fZuqWxITq38?si=V4EFG3Xq54DRlGnq

<셜록 주니어>(1924)

https://youtu.be/YWm587wKKVw?si=8d8s870G6pXUiprl

<제너럴>(1926)

https://youtu.be/Gb05YZtJ3FE?si=AoWKEoX_njC0A7hB

<스팀보트 빌 주니어>(1928)


A3FC793A-C4D2-4701-B8A4-02EE51B64F9C_1_201_a.heic 제프 쿤스의 <Buster Keaton> (1988) LA 더 브로드 미술관 전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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