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 사람들은 그를 The Tramp(떠돌이)라고 불렀죠. 하지만 그는 단순한 코미디 배우가 아니었습니다. 작은 중절모에 헐렁한 바지, 커다란 구두를 신고 비틀거리며 걷던 이 남자는 19세기 말 런던 빈민가에서 태어나 20세기 할리우드를 사로잡은 전설이 되었어요.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이자,
직접 영화를 쓰고 연출하고 음악까지 만든
완벽한 예술가였습니다.
가난과 불평등을 유머로 풀어내고,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담아냈습니다.
《모던 타임스》 - 산업화된 세상을 비꼬았고
《시티 라이트》 - 눈먼 소녀와 떠돌이의 가슴 뭉클한 사랑을 보여줬어요
《위대한 독재자》 - 히틀러를 정면으로 조롱하며 전쟁과 독재를 강하게 비판했죠
찰리 채플린, 그 이름은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마법 같은 이름입니다. ✨
1889년 4월 16일, 영국 런던의 빈민가 사우스워크에서 찰스 스펜서 채플린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예술과 가난을 동시에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 찰스 채플린 시니어는 인기 있는 바리톤 가수였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가정을 버렸고, 어머니 해나 채플린(예명: 릴리 할리)은 가난한 무대 배우였지만 건강이 나빠지면서 무대에서 밀려났죠.
가난은 우리 가족의 운명이었다.
우리는 길에서 살았고, 길에서 자랐다.
어린 채플린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12살 때 아버지가 술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정신병 증세를 보이며 병원에 입원하면서 형 시드니와 함께 고아원과 빈민 구호소를 전전했죠. 그는 나중에 자서전에서 "배고픔이 나의 첫 번째 기억이었다"라고 적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세계의 공장'이라 불릴 만큼 번영했지만, 그 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가 있었어요. 특히 런던 남부 사우스워크는 열악한 주거환경과 높은 범죄율로 악명 높은 곳이었고, 수십만 명의 빈민이 살았습니다.
운명이 바뀐 건 10살 때였습니다. 어머니의 소개로 작은 극단에서 단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거죠. 채플린은 타고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14살에는 정식으로 뮤직홀(영국식 버라이어티 쇼) 배우가 되었고, 16살에는 영국 최고의 코미디 극단인 '프레드 카노 극단'에 들어갔어요. 이곳에서 그는 '완벽주의자'로 불릴 만큼 코미디 연기에 몰두했고, 무대에서 이미 천재성을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가난했기 때문에,
오직 웃기는 것만이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길이었다.
그는 무대에서 사람들을 웃기면서 자신의 슬픔을 이겨냈고, 점점 더 큰 무대로 나아갔죠. 특히 프레드 카노 극단의 미국 순회공연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공연을 본 미국의 영화 제작자 맥 세네트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할리우드로 스카우트했기 때문입니다.
1913년, 당시 24살이었던 채플린은 고민 없이 미국행을 선택했습니다. 런던의 가난한 소년은 이제 할리우드로 향하는 배에 올랐고, 그곳에서 영화사를 새로 쓰게 될 거란 건 아직 아무도 몰랐습니다.
1914년, 채플린은 키스톤 스튜디오에서 첫 영화 《유치장에서의 생활》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영국 뮤직홀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영화는 무대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첫 작품에서 그는 능글맞은 사기꾼 역할을 맡았지만, 스튜디오 내부에서조차 특별한 평가를 받지 못했죠.
그러던 어느 날, 운명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두 번째 영화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 촬영을 앞두고, 채플린은 감독 헨리 레만에게 직접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요청했어요. 분장실로 간 그는 여기저기 널려있는 의상들을 하나씩 골라 입기 시작했습니다.
몸에 너무 큰 바지
너무 작은 재킷
너무 큰 구두
낡은 중절모
작은 콧수염
나는 가장 값싼 옷들을 골랐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이니 품격이 생겼다.
리틀 트램프는 가난하지만,
언제나 신사다.
실제로 이 캐릭터는 그가 빈민가에서 보고 자란 실제 거리의 가난한 노동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어요.
영화에서 리틀 트램프는 카메라 앞에서 자꾸만 끼어드는 방해꾼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자동차 경주를 찍는 도중 갑자기 나타나 관객들에게 꾸벅 인사하고,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화면을 장악했죠. 이 단순한 장면이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키스톤 스튜디오는 즉시 그를 주연으로 발탁했습니다.
채플린은 키스톤에서 1년 동안 35편의 단편 영화를 찍었어요. 하지만 점점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커져갔습니다.
맥 세넷은 그를 인정했지만, 여전히 스튜디오 시스템의 일부로만 여겼죠. 그러던 중 1915년, 에사네이 스튜디오에서 주당 1,250달러라는 파격적인 계약을 제안했고, 채플린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키스톤을 떠났습니다.
에사네이 스튜디오에서 채플린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는 단순한 배우가 아닌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자 작가가 되었습니다. 촬영장에서 한 장면을 수십 번씩 반복해서 찍으며 완벽한 타이밍을 찾아갔죠. 키스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에사네이는 그의 완벽주의를 허락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걸작 《리틀 트램프》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슬랩스틱 코미디가 아니었어요. 웃음과 감동이 공존하는 특별한 작품이었죠.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트램프가 연인을 떠나보내고 혼자 길을 떠나는 모습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습니다. 관객들은 트램프를 더 이상 단순한 희극 캐릭터가 아닌, 진짜 인간으로 보기 시작했어요.
리틀 트램프는
인간적 고뇌와 외로움을 지닌 존재다.
1916년, 채플린은 또다시 스튜디오를 옮깁니다. 이번에는 뮤추얼 필름이었죠. 여기서 그는 할리우드 최고의 연봉자가 됩니다. 주급 10,000달러, 연봉으로 환산하면 67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200억 원)였어요. 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창작의 자유였습니다.
뮤추얼에서 만든 대표작 《이지 스트리트》는 미국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담아냈습니다.
트램프가 경찰이 되어 빈민가를 지키려 하지만, 갱단과 부패한 권력에 시달리는 내용이죠.
이 영화는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채플린이 목격한 미국 사회의 빈부격차와 폭력을 풍자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시기 채플린은 연출 스타일도 완성했습니다:
섬세한 감정 표현
완벽한 타이밍의 슬랩스틱
웃음 속에 숨겨진 사회 비판
채플린은 뮤추얼에서 완벽한 자유를 누렸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큰 꿈을 꾸고 있었죠. 당시 할리우드는 영화사가 배우를 '소유물'처럼 다루는 스타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었어요. 채플린은 이 시스템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1917년이 끝나갈 무렵, 채플린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그는 완전한 독립을 꿈꾸게 됩니다. 자신의 스튜디오를 세우고, 온전히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그날을 향해서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채플린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퍼스트 내셔널과 계약을 맺고 자신만의 독립 스튜디오를 세운 거죠. 이제 그는 더 이상 스튜디오에 소속된 배우가 아닌, 자신만의 왕국을 가진 영화제작자가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채플린은 바빴습니다.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전쟁 채권 판매 홍보에 참여했는데, 뉴욕에서 그의 즉흥 연설은 하루 만에 1억 달러(현재 가치로 약 14조 원) 이상의 채권을 팔아치우는 기록을 세웠어요.
- 채플린의 혁신적 작품들
《어 독스 라이프》 - 전쟁 후 피폐해진 미국 사회를 담아낸 작품
《숄더 암스》 - 전쟁을 풍자한 대담한 작품
1919년, 그는 메리 픽퍼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W. 그리피스와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A)'를 설립했어요. 이는 할리우드 역사상 최초의 독립 영화사였습니다.
나는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나는 배우이자 제작자,
그리고 예술가가 될 것이다.
이 시기에 채플린은 자신만의 영화 제작 방식도 완성했습니다. 그는 즉흥성을 중시했지만, 동시에 완벽을 추구했죠. 한 장면을 수백 번씩 찍기도 했고, 때로는 몇 달씩 촬영을 중단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다녔습니다.
1923년, 채플린은 이제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배우, 감독, 제작자, 작곡가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완벽한 영화작가로 성장했고, 그의 도전은 할리우드의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1924년, 채플린의 야심작 《황금광 시대》를 발표했습니다. 알래스카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8개월의 촬영 기간과 92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죠.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채플린의 대표작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시기에 할리우드는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1927년, <재즈 싱어>의 성공으로 유성영화 시대가 열린 거죠. 하지만 채플린은 달랐습니다. 그는 무성영화를 고집했어요. 1928년 <서커스>, 1931년 <시티 라이트>까지, 모두 무성영화로 만들었습니다.
말이 필요 없다.
몸짓과 표정만으로도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시티 라이트>는 채플린의 고집을 증명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영화가 소리를 도입할 때, 그는 3년이라는 시간과 16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무성영화를 만들었어요. 시각장애인 꽃파는 소녀와 떠돌이 신사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말 없이도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채플린의 무성영화는 특별했습니다. 해럴드 로이드나 버스터 키튼 같은 다른 코미디언들도 뛰어났지만, 채플린만의 독특한 점이 있었죠. 그의 영화는 단순한 웃음을 넘어 인간의 고독, 사랑, 빈곤 같은 깊은 주제를 다뤘습니다. 특히 리틀 트램프라는 캐릭터는 가난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고, 불행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했어요.
제작 방식도 남달랐습니다. 그는 즉흥적으로 촬영을 시작하고, 때로는 수백 번의 테이크를 요구했습니다. <시티 라이트>의 마지막 장면은 무려 342번을 찍었다고 해요. 배우들은 힘들어했지만, 그의 완벽주의는 걸작을 만들어냈습니다.
1936년까지 이어진 채플린의 무성영화 시대는 영화사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는 말 없이도 전 세계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웃음과 감동을 함께 전하는 독특한 예술 형식을 완성했습니다. 무성영화는 시대에 뒤처진 게 아니라, 채플린의 손에서 완벽한 예술이 되었던 거죠.
1936년, 채플린은 자신의 첫 유성영화 <모던 타임즈>를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사는 없었어요. 대신 기계음과 효과음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산업화 시대의 비극을 그렸습니다.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려 나사를 조이다 결국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노동자의 모습은, 현대 사회를 향한 강력한 풍자였죠.
이제 채플린의 코미디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1940년 만든 <위대한 독재자>는 그의 첫 대사 영화였어요. 히틀러를 닮은 독재자 힝켈을 연기하며 파시즘을 정면으로 비판했죠. 특히 영화 마지막의 연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리틀 트램프의 콧수염을 한 채로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인류애와 평화를 호소했으니까요.
나는 독재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도
지배하거나 정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대사는 전 세계를 울렸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채플린에게 큰 위험이 되었어요. 미국이 아직 참전하지 않은 시기에 나치를 비판한 이 영화는, 그를 '위험한 예술가'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의 <살인광 시대>는 더 나아갔습니다. 여주인공의 부자 남편들을 살해하는 연쇄 살인마 블루비어드를 코미디로 그리며, 미국 사회의 위선과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했어요. 특히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사회 풍조를 신랄하게 비꼬았죠.
채플린의 정치적 메시지는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그는 노동자의 권리를 지지했고, 전쟁에 반대했으며, 인종차별을 비판했어요.
코미디언은 관객을 웃게 만드는 것을 넘어,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그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FBI는 그를 '빨갱이'로 의심했고, 보수 언론은 그를 '反미국적 인물'로 몰아갔죠. 채플린은 예술가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켰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메시지는 결국 그를 미국에서 추방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으니까요.
1947년,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빨간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매카시즘이라 불린 이 광기어린 반공주의는 할리우드까지 뒤흔들었어요. 그리고 채플린은 주요 표적이 되었습니다. FBI는 20년 넘게 그의 파일을 모았고, 보수 언론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갔죠.
1952년, 유럽 홍보 여행을 떠난 채플린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그의 재입국을 금지한 거예요. 당시 그는 영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미국 영주권이 필요했는데, 정부가 이를 취소해버린 겁니다.
나는 이 나라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스위스 베베에 정착한 채플린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1957년 <왕 뉴욕에 가다>는 그의 추방 경험을 풍자한 작품이었습니다. 망명한 국왕이 미국에서 겪는 우여곡절을 그리며, 매카시즘을 신랄하게 비판했죠.
1967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 <홍콩 백작부인>을 만들었습니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78세의 나이에도 영화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같은 해에는 자서전도 출간했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망명 생활 동안 채플린은 전 세계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1972년,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는 그를 오스카 시상식에 특별상 수상자로 초대했어요. 20년 만의 미국 방문. 채플린은 12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말없이도 웃게 만들었던 사람이,
이제는 말없이 울게 만든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스위스에서의 평화로운 생활을 더 사랑했거든요. 1977년 크리스마스,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죽음으로도 평화를 얻지 못했어요. 3개월 후 도굴꾼들이 그의 관을 도난했고, 시신을 되찾은 뒤에야 그는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918년 가을, 29살의 채플린은 17살의 여배우 밀드레드 해리스와 결혼합니다. 그녀의 임신 소식에 서둘러 올린 결혼이었죠. 하지만 이는 비극적으로 끝났습니다. 아이는 3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두 사람은 2년 만에 이혼했어요. 이 시기 채플린은 슬픔을 영화에 담았습니다. <키드>에서 고아를 키우는 트램프의 모습은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924년, 더 큰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황금광 시대> 촬영 중이던 채플린이 16살의 리타 그레이와 결혼한 것이죠. 이 소식은 할리우드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영화 제작도 중단됐어요. 두 사람 사이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지만, 1927년 이혼으로 끝났습니다. 당시 92만 5천 달러의 위자료는 할리우드 역사상 최고액이었죠.
파울렛 고다드와의 관계는 달랐습니다. 1932년 만난 그녀는 단순한 연인이 아닌 예술적 파트너였어요. <모던 타임즈>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그녀는 채플린의 예술 세계에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늘 불분명했죠. 채플린이 그녀를 아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은 1940년 <위대한 독재자> 개봉 즈음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1943년의 조안 배리 소송은 채플린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24살이었던 배리는 채플린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어요. 혈액형 검사로 채플린의 무고가 증명됐지만, 이 사건은 FBI가 그를 주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사랑은 달달했습니다. 1943년, 54살의 채플린은 18살의 오나 오닐을 만났습니다.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이었던 그녀와의 결혼은 또다시 스캔들이 됐지만, 이번에는 달랐어요. 두 사람의 사랑은 채플린의 생애 마지막까지 이어졌고,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스위스에서의 망명 생활은 채플린에게 진정한 가정의 기쁨을 선물했습니다. 레만 호수가 보이는 저택에서 그는 마침내 평화를 찾았죠. 평생 그를 따라다녔던 스캔들의 그림자는 오나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 속에서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채플린의 작품 속 여성들은 흥미롭습니다. 초기 영화의 해맑은 여인들부터, <시티 라이트>의 눈먼 꽃파는 소녀, <모던 타임즈>의 자유로운 부랑자 소녀까지. 그의 실제 연애사만큼이나 다채롭고 복잡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죠. 어쩌면 그의 영화는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늘 상처받았던 한 예술가의 자전적 기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채플린이 남긴 영향력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습니다. 현대 영화에서 그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어요. 마틴 스콜세지는 "채플린이 없었다면 현대 영화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우디 앨런은 자신의 영화 스타일이 채플린에게서 왔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코미디 영화의 혁신자로서 그의 업적은 독보적입니다. 채플린 이전의 코미디는 단순한 슬랩스틱에 불과했지만, 그는 웃음에 예술성과 메시지를 더했어요.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비극적 상황에서 코미디를 찾는 영화들은 모두 채플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죠.
영화 제작 시스템도 채플린이 바꿨습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설립은 할리우드에 '독립 영화' 개념을 도입했어요. 오늘날 감독들이 자신만의 제작사를 세우고 작품을 만드는 건, 채플린이 개척한 길입니다.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이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드림웍스도 이런 전통을 잇고 있죠.
사회비판적 예술가의 모델로서도 채플린은 중요합니다. 그는 예술가가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믿었고, 실제로 행동했어요. <모던 타임즈>에서 산업화를 비판하고, <위대한 독재자>에서 파시즘에 저항했던 것처럼요. 오늘날 많은 영화인들이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것도 채플린의 영향입니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그의 혁신은 계속됩니다. 무성영화 시대의 정교한 몸짓 연기는 현대 영화의 비주얼 스토리텔링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특히 액션이나 코미디 장면에서 채플린의 영향을 쉽게 발견할 수 있죠. 재키 챈은 자신의 액션 코미디가 채플린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채플린의 영화들은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1992년 유네스코는 그의 작품들을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했고, 매년 전 세계에서 채플린 영화제가 열리고 있어요. 런던의 채플린 동상, 스위스의 채플린 박물관처럼 그를 기리는 공간도 늘어나고 있죠.
스탠리 큐브릭은 "채플린은 영화의 모든 것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페데리코 펠리니는 "채플린의 영화는 빛으로 쓴 시"라고 극찬했습니다. 최근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패러렐 마더스> 인터뷰에서 "채플린에게서 감정과 사회의식의 완벽한 균형을 배웠다"고 밝혔죠. 데이비드 린치는 <트윈 픽스>의 꿈 장면들이 채플린의 초현실적 코미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채플린의 무성영화처럼 언어를 초월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떠난 지 반세기가 되어가지만, 그의 영향력은 영화라는 예술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대표작 3편을 직접 보러 가시죠!
1. 모던 타임스 (Modern Times, 1936)
✔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서 기계처럼 살아가는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풍자
✔ 유머와 비판이 절묘하게 섞인 채플린의 대표작
✔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사가 풀리는 장면, 기계를 조작하다 미쳐가는 장면이 명장면
https://youtu.be/6n9ESFJTnHs?si=gaXyZFBApC41uA17
2.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1940)
✔ 히틀러와 나치를 풍자한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
✔ 채플린의 첫 번째 유성영화
✔ 마지막 연설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렬한 연설 중 하나로 평가됨
https://youtu.be/pHZ46sQkzqU?si=GcwccbJOaRlPDPaT
3. 시티 라이트 (City Lights, 1931)
✔ 눈먼 소녀와 떠돌이의 가슴 아픈 로맨스를 다룬 무성영화
✔ 감동적인 스토리와 유머가 조화를 이루는 채플린 최고의 감성 영화
✔ 엔딩에서 소녀가 눈을 뜨고 채플린을 알아보는 장면은 전설적인 명장면
https://youtu.be/o9NfXIXzgnA?si=eSJ65oFw44knrU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