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바다'

by 소래토드



문을 열고 나가보니 밖은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그리고 노인의 말대로, 그곳에 하얗고 아름다운 실내 정원이 있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흰색으로 칠해진 아름다운 철제 장식 사이로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정원 중앙에 놓인 하얀 대리석 조각의 분수대 꼭대기에서 맑은 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집 앞 정원과는 완전히 다른, 집 뒤편에 숨겨진 이 아름다운 정원은 생생한 기운이 가득했다.


공원 출구에서 '바다'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수수한 모양의 표지판을 발견했을 때, 로이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노인에게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로이는 이제 곧 바다를 볼 생각에 설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로이는 크고 화려한 필체로 ‘좋은 바다’라고 휘갈겨 쓰여있는 입구를 만나게 되었다. 로이는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좋은 바다'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곳에는 로이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땅을 파고 그 안에 집어넣은 듯한 거대한 오렌지색 통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바닥은 온통 진갈색과 황색이 섞인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중간중간 진흙 더미의 약간 마른 부분에는 이끼처럼 생긴 흑녹색의 자잘한 식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로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오렌지색 통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통 안에는 물이 어느 정도 채워져 있었다. 바닥에는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 곁에 꽤나 정교한 기계가 물결을 일으키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 기계의 일부는 양쪽 면이 모두 심하게 녹이 슨 채로 물속에서 회전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꼭 날개 같은 모양이었다. 그 날개의 모양은 로이가 어디선가 분명히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쉽게 떠올리지는 못했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탁한 물에서는 독특한 냄새가 진동을 했는데, 로이는 이것과 똑같은 냄새를 맡았던 순간을 즉시 기억해 내었다. 그것은 ‘좋은 바다’가 있다는 것을 로이에게 알려주었던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그 냄새였다. 민물의 비릿한 냄새와 녹슨 쇠 냄새가 뒤섞인... 노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로이의 뇌리에 스쳤다.


“이곳에 좋은 바다가 있단다...... 파도가 야트막하고, 물은 따뜻하고, 모래는 진흙처럼 아주 부드럽단다.”


"이게... 바다라고? 아니, 좋은 바다라고?"


로이는 순간, 하얀 정원에서 보았던 수수한 모양의 '바다' 표지판과, 조금 전 발견했던 크고 화려한 필체의 '좋은 바다' 표지판이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달았다. 노인은 애초부터 로이에게 '바다'로 가도록 길을 알려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소개한 것은 이 오렌지색 통으로 만들어진, "좋은 바다"였던 것이다.


로이는 멀리서부터 점차 다가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로이가 통로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빨간 벽돌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오렌지색 통으로 들어가기 위해 '좋은 바다'의 입구에서부터 줄지어 서기 시작했다. 베개로 가득한 방에서부터 재빠르게 빨간 벽돌집의 마지막 출구까지 뛰어오는 바람에, 로이는 저 줄에 서지 않고 미리 '좋은 바다'의 안에서 밖을 목도할 수 있었다.


줄을 서는 사람들에게는 차례로 옷과 조금의 음식, 장신구가 주어졌다. 옷과 음식과 장신구를 나누어주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조금 전에 만났던 그 젊은이였다. 가녀린 떨림으로 제자리를 맴돌던 금색 시계 초침의 시계가 걸려있는 바로 그 방 문가에 앉아 있던 젊은이... 로이는 그 젊은이의 활기찬 표정과 몸짓에 충격을 받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수명을 다한 말굽처럼 텅 비어있으나, 그의 몸짓만큼은 크고 화려했다. 로이에게는 그 모습이 기이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입구 안으로 들어서며 서 있는 상태로 음식을 먹고 옷과 장신구를 걸쳐 입고, 오랫동안 다물고 있어 풀기가 생겨버린 입술을 간신히 떼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습하고 냄새나는 방 안에서 기력 없이 누워있던 사람들이 그 순간만큼은 활기가 도는 것처럼 보였다. 음식을 받아먹고 새 옷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를 걸친 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 잠시 잠깐의 순간만으로 보면 이 오렌지색 통으로 만든 '좋은 바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이상한 일들을 좋은 일이라 여겨도 되는 것은 아닐지... 로이는 혼동이 되었다.


이윽고 오렌지색 통에 다다른 사람들은 통 주변에 있는 진흙 위에 걸터앉아 물속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사람들은 그 ‘좋은 바다’에 빠지는 일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들어오기 전에 제공받았던 새 옷이 더러운 물에 젖고 장신구의 일부가 벗겨져 물속에 잠겼지만,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아쉬워하지도 않고 그 모든 것을 초월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무엇에 취한 사람들처럼 서로 어울리며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거만하게 굴었다.


로이의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 기이했다. 그가 보기에 이 오렌지색 ‘좋은 바다’에는 좋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온통 말도 되지 않는 가짜 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이는 이 어리석은 여정에 뛰어든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여 화가 날 지경이었다.


결국 로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좋은 바다'를 뒤로하고 돌아서 걸어 나갔다. 그의 발이 '좋은 바다'의 입구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누군가의 손이 로이의 팔을 붙잡았다. 사람들에게 옷과 음식을 나누어주던 그 젊은이였다. 그는 로이에게 옷과 음식을 내밀었다. 로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이의 눈과 젊은이의 눈이 오랫동안 마주쳤다. 긴 침묵의 끝에 젊은이는 말했다.


"우리가 아니야. 네가 이상한 거야. 이게 옳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놀랍게도 젊은이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아름다웠다. 로이는 그것이 더 서글프고 애달프게 느껴졌다.


"나와 함께 가요. 이곳에서 벗어나요."


젊은이는 대답을 하지도 고개를 젓지도 않고, 다시한번 로이를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로이를 설득하려는 듯 보였지만 그 공허한 눈에는 힘이 없었다. 로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떻게 이걸 좋은 바다라고 믿을 수 있는 거죠? 아니, 좋기는커녕 바다도 아닌 이것을!”


젊은이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살짝 흔들리더니 다시 초점이 풀리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로이의 눈과 마주친 젊은이의 눈빛은 교만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로이는 자신이 젊은이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젊은이는 로이에게서 돌아서서 자신의 '좋은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뒤돌아선 젊은이의 등, 어깻죽지에서 툭 튀어나온 그의 뼈가 오렌지색 통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기계 소리에 맞춰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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