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

by 소래토드



문득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미지근하고 눅눅한 공기 사이로 새어 들어와 로이의 얼굴에 와닿았다. 로이는 비로소 겨울의 한기를 느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고 서늘한 바람을 최대한 예민하게 느끼려 노력했다. 그러자 가느다란 바람 줄기가 점점 넓게 펼쳐지더니 순식간에 파도처럼 로이의 몸 전체에 덮쳐왔다. 그리고 그 순간, 선명하고 일정했던 바로 그 시계 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다시금 들려왔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소리가 로이의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 느껴지자 로이는 차갑고 신선한 공기의 파도 속에서 눈을 떴다.


“바다다!”


놀랍게도 로이의 눈앞에, 오렌지색 통 너머로, 매섭게 파도치는 밤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는 하얀 정원에 있던 표지판은 바다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바닷바람이 점점 더 거세게 밀려와 시계 소리가 끊임없이 로이에게 가 닿게 하고 있었다.


“조심하는 게 좋아. 너도 들리는 게냐 저 소리가?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그 시계 소리 말이야.”


아까 그 노인이 다시 한번 로이 옆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그는 진짜 바다로 향하는 길목에 파묻어둔 오렌지색 통만큼이나 성가시게 로이와 바다 사이를 간섭하며 서 있었다. 노인은 다시 말했다.


“저 시커먼 물에서 나오는 소리를 조심하라고.”


로이는 눈에 힘을 주고 노인에게 말했다.


“당신이 가르쳐준 곳에는 바다가 없었어요."


그는 로이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말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저 차가운 물 밖으로 밀려 나오지.

너도 그렇게 되고 싶은 게냐? 정신 차리고 여길 봐."


그는 우아한 손짓으로 오렌지색 통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했다.


"이곳이 바로, 좋은 바다야.”


“그건 바다가 아니죠! 당신이 사람들을 그곳으로 이끌었나요? 나에게 한 것처럼?”


로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리쳤다. 그러나 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오히려 로이가 자신에게 아무리 무례하게 군다 하여도 자신은 계속해서 자비로운 마음가짐으로 품위를 지킬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로이에게 말했다.


“이곳은 안전해. 우리가 이렇게 안전하고 재미있고 따뜻한... 좋은 바다를 만들어 낸 거야.”


그리고는 쳐다도 보기 싫다는 듯이 한쪽 손으로는 자신의 두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면서 진짜 바다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저 험한 꼴의 끈적이는 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거지.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지. 그 소리는... 그 시계 소리는 몇 번만 무시하고 둔하게 굴면 사라져서 더는 널 괴롭히지 않을 거야.”


“괴롭지 않아요.”


“처음엔 그렇겠지. 하지만 그 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다 보면, 넌 결국 저 바다에 가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고 말걸. 그리고 그 시커먼 속으로 뛰어 들려하겠지. 난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왔어. 그러나 아이야, 너는 반드시 알아야 해. 바다는 결코 사람이 건널 수 없는 곳이라는 걸. 그 한가운데 이는 거대한 풍랑은 그 누구도 감당해 낼 수 없어. 넌 결국 그 차가운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 가라앉은 시체가 되어 육지로 떠밀려 오게 될 거야. 잘 들어, 아이야…… 바다는 정말로 위험하단다.”


노인은 로이의 어깨에 양손을 올려 지그시 누르며, 얼굴을 가까이 대고 로이와 눈에 자신의 눈을 억지스럽게 맞추었다. 노인이 입을 열자, 그 비릿한 민물냄새와 녹슨 쇠냄새가 다시 한번 뿜어져 나왔다.


“한번 가까이 가면, 그 나무로 된 선착장에 발을 디딘다면, 최악의 경우 그 붉은 나무로 된 배에 타기라도 한다면, 너는 절대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을 거야.”


로이는 자신의 어깨에 놓인 노인의 부드러운 손을 구렁이를 떨쳐내듯 떨쳐 내었다. 노인은 못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떤 자가 길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그 붉은 배에 태우려 하지. 그 자를 조심해야 해. 혹시 너도 그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은 아니겠지?”


“그가 누군데요?”


“자유로운 자, 그러나 누가 그를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실은 온통 불편하고 쓸데없는 것에 스스로 묶여있는 못난 놈이지.”


“당신은 자유로운 가요?”


“나? 어디서 말이냐? 이곳에서 난 누구보다도 자유롭지. 나는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고 필요하다면 내 이름과 다른 사람들의 이름까지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단다.”


“그 말은, 다른 곳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소리군요. 또 당신은 진실된 이름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하는군요. 그 자유로운 자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을 하고서 대답도 듣기 전에, 로이는 켄트를 떠올렸다. 켄트. 그에게는 두려움도 초조함도 막힘도 없었다. 로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무엇에도 매여있지 않은 사람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로이였지만, 켄트와 함께 지내면서부터는 로이도 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켄트는 어떤 어둠의 존재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로이의 표정을 찬찬이 읽던 노인은 불현듯 눈을 번뜩이더니 사나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너! 너 그자와 함께 온 것이 분명하구나!”


그리고는 자신이 아주 위대한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자는 사기꾼이야. 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가려는 그 셋째 하늘이라고 말하는 곳은 죽어야만 도착할 수가 있어. 너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그리고 마침내 너는 …… ”


노인은 너무 시끄러웠고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딱딱해지고 있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눈썹과 광대뼈, 입, 턱, 목이 마치 도자기처럼 딱딱해지고 있었다. 로이는 더는 그 노인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도, 말을 듣고 있을 수도 없었다.


로이는 노인에게서 관심을 돌리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신선한 바람과 파도 소리, 그리고 로이의 심장 가에서 선명하게 울리고 있는 시계 소리에 집중했다. 이윽고 로이는 계속해서 떠들고 있는 노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로이의 강렬한 눈빛에 노인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로이는 말했다.


“진짜가 아닌 것은 기쁘지 않아요. 나는 당신과 당신의 바다, 그중 어느 하나도 기뻐할 수가 없어요.”


로이는 돌아서서 자신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등 뒤로 노인의 고함소리가 들렸지만, 로이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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