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좁은 공간 속에 꽉 들어찬 사람들이 내뿜는 숨과 체온으로, 공기는 발이 바닥에 쩍쩍 붙을 만큼 습해져 있었다. 뒤섞인 역한 땀냄새에 로이는 소매로 코를 막은 채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가운데 통로를 두고 방들이 양 옆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왜인지 문은 모두 활짝 열려있었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모두 소매가 없었고 온통 땀에 절어 있었다. 밖은 몹시 추운 겨울인데, 이 안의 모습은 마치 한여름 같았다. 사람들은 기운 없이 누워있거나 문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방 입구에는 지저분한 짐가방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는데, 먼지와 오물이 수북이 가방 위에 쌓여 있는 것을 보니 오랜 여행 때문이 아니라 한 자리에 오래 놔두어 더럽혀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어디 선가 아주 선명한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그 소리는 눅눅한 공기 사이에서 마치 벌이나 나비처럼 움직였다. 귓가와 머리 위로 맴도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가 날아가듯 점차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눈으로 좇으며 로이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소리의 근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영영 후회할 것만 같은, 어쩌면 이 소리가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아주 생소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로이는 이어진 통로를 따라 걸음을 조금 더 옮겼다.
째깍. 째애깍. 째애애깍.
어느 한 방을 지날 때였다. 아까 그 시계 소리의 여운이랄까, 비슷하지만 더 약하고 점차 느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는 재빨리 그 방 안쪽을 살폈다. 문 가에 기대어 앉아 있던 젊은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로이는 그의 안색을 잠시 살피고는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부터 쌓였는지 모를 여러가지 오물이 덮인 그 방에서 로이는 드디어 소리를 내는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벽시계였다.
벽시계는 사람들의 짐짝처럼 먼지가 뿌옇게 앉아있었다. 로이는 까치발을 들고 웃옷 소매를 손바닥까지 당겨 쥐고는 시계의 표면을 닦아 내었다.
째깍 째애깍 째애애깍.
째깍 째애깍 째애애깍.
동그란 벽시계 안쪽 둘래에는 로마자로 된 숫자 표기가 있었고 검은색의(하도 오래되어 거의 회색빛에 가까운) 두껍고 짧은바늘이 10시와 11시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멈춰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다른 바늘은 끄트머리에 녹이 심하게 슨 채로 역시 멈춰있었다. 물론 그 두 바늘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소리가 나는 바늘은 바로 가장 가늘고 긴, 마치 머리카락처럼 미세한 금색 초침이었다. 그것은 로마 숫자 6과 7 사이에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초침의 진행은 세 번을 넘기지 못하고 도로 당겨지며 가녀린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었다.
로이는 방 입구에 누워있는 젊은이를 돌아보았다. 방 안에서 들리는 초침 소리가 그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져있는 젊은이의 가녀린 어깨가 간간이 바르르 떨렸다.
로이 마음의 깊은 곳에서 갑자기 알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로이는 방 안에 주저앉아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모른 채 엉엉 울었다. 사실 로이는 여태껏 누군가를 위해서나 스스로를 위해서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로이는 그렇게 울고 있는 자신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젊은이는 오열하고 있는 로이를 흘끗 한번 보고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고, 닳아서 쓸모를 다 한 말굽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로이는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얼굴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로소 이 통로에 들어서야 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아, 바다!"
로이는 노인이 일러준 방향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걸음을 내딛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공기가 서서히 맑아지고 있었다. 로이는 이제 막 세 번째 벽돌집의 통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에는 텅 빈 방들이 줄지어 이어져 있었다. 통로를 바삐 걷던 로이는 어느 순간부터 그 텅 빈 방들의 벽면을 하나씩 살펴보게 되었다. 조금 전에 젊은이가 누워 있던 방에서 로이가 발견했던 그 시계와 똑같이 생긴 둥근 벽시계가 방마다 하나씩 걸려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 시계들은 하나같이 완전히 멈춰 있었다. 시침도, 분침도, 심지어 초침조차도—모두 한 자리에 그대로 멎어 있었다.
세 번째 벽돌집의 마지막 방을 지날 때, 로이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방에도 역시 멈춰진 시계가 있었지만, 이번에 로이의 관심을 끈 것은 방 한가운데 놓인 캐러멜색 베개였다. 로이는 물끄러미 그 캐러멜색 베개를 바라보았다.
살아왔던 시간 동안 경험했던 캐러멜색 존재들이 로이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고향 숲 길 위의 의자로 삼아 놀던 나무 둥치들, 어머니께서 끓여주셨던 양파 수프, 가죽 꼬까신, 손에 쥔 낙엽의 바스락 거림과 향기… 그 존재들은 모두 로이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들이었다.
로이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그 캐러멜색 베개 외에도, 로이의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베개들이 방의 절반을 채우며 천정까지 차곡히 쌓여 있었다. 아주 부드럽고 푹신해 보이는 베개들이었다. 로이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방에 놓여있던 까슬한 리넨천으로 마른 짚을 감싸 만든 침구를 떠올렸다. 그 침구도 나름 편안했지만, 이 베개들이 주는 안락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로이는 은은한 광택이 도는 그 캐러멜색 베개를 살짝 매만졌다.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부드럽고 푹신하고 말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급한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던 로이는, 방금 느껴버린 그 만족스러운 감촉에 빠져들어 자기도 모르게 베개 위로 스르륵 몸을 눕히고 말았다. 로이의 작은 몸이 부드러운 베개 사이로 살며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로이는 계속해서 다른 베개 사이로 슥슥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이의 몸이 닿은 베개 안쪽에서 어린아이들이 한 명씩 나오기 시작했다.
베개에서 빠져나온 예닐곱 명의 아이들은, 방 한구석에 한데 서서, 가장 밑바닥의 베개 사이에 끼인 로이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로이는 그런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편안하게 눈을 감고 온 몸으로 베개의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그중 가장 키가 큰 아이가 방 한쪽 끝의 베개 위로 올라섰다. 곧 나머지 아이들도 모두 그 아이를 따라 각기 다른 베개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아이들은 능숙하게 베개 이쪽에서 저쪽으로 뛰어오르며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이곳저곳에서 뛰어오르는 소란 속에 마침내 로이가 눈을 떴다.
“이게 다 무슨 난리지?”
정신이 번쩍 든 로이는 베개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상에!"
이리저리를 오가며 뛰어노는 아이들 주변으로 노란색 먼지가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베개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먼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베개 위에서 뛰면 뛸수록 먼지는 점점 더 진하게 올라왔다. 노란색 먼지는 구름처럼 뭉쳐지면서 로이를 향해 밀려왔다. 로이는 재빨리 손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방에서 빠져나왔지만 서두르느라 그만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뛰어놀던 아이들은 짙어진 먼지 속에서 기침을 해대다가 베개 사이사이로 다시 들어갔다. 아이들이 베갯속으로 사라지자 노란 먼지도 점차 잦아들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로이는, 급히 일어나 마지막 빨간 벽돌집의 통로 끝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마침내 로이는 노인이 일러주었던 마지막 출구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