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문

by 소래토드



얼마나 지났을까. 로이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피곤이 덜 풀려 뻣뻣한 몸을 살짝 뒤척이자 두텁고 보송보송한 리넨으로 씌운 매트리스 속에서 잘 마른 짚이 바스락거리며 소리를 냈다. 로이는 반쯤 뜬 눈으로 몸을 겨우 일으켜 앉았다.


침대 옆, 작고 반듯한 탁자 위에 로이가 잠든 사이 켄트가 놓아두고 간 램프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로이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과 간소한 가구들이 모두 흰색으로 옅게 칠해진 작고 깨끗한 방이었다.


찬찬이 살피던 로이의 눈이 갑자기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들어왔던 방 문 옆에 똑같은 문 하나가 더 있었던 것이다.


‘들어올 때 바로 옆에 있었던 그 문인가? 켄트가 내 방은 분명 오른쪽이라고 했는데… ’


호기심에 잠이 바짝 깨어 버린 로이는 그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레몬 껍질처럼 옅은 노란색으로 칠해진 두 개의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한쪽 문의 나무 문고리에는 잎사귀 무늬가 자잘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 문의 나무 문고리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밋밋했다. 로이는 잎사귀가 조각된 나무 문고리를 잡고 살며시 돌려보았다. 문은 소리하나 내지 않고 매끄럽게 열렸다.


‘역시, 다른 곳이었구나!’


열린 문 틈으로 보이는 공간에는, 낮에 로이와 켄트와 함께 서 있었던 계단 끝 복도가 아닌, 확실히 다르게 생긴 통로가 있었다. 아래층으로 이어진 계단도 없었고, 빛이 아래로 먼지처럼 내려앉게 했던 그 근사한 지붕창도 없었다. 그곳에는 사방의 모든 벽이 막혀 있는, 마치 길쭉한 방처럼 생긴 통로가 있었다. 로이는 별생각 없이 발을 내밀어 슬쩍 그 통로로 들어섰지만, 등 뒤로 문이 닫히려는 순간 재빠르게 돌아서서 두 손으로 문을 붙잡았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놓인 램프를 챙겨가지고 다시 통로로 나왔다. 통로 안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로이는 스무 걸음 만에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잎사귀 문양이 새겨진 나무 손잡이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로이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밀어 열었다.


"윽..."


그 순간, 문 틈으로 뜨끈하고 눅눅한 공기가 훅 밀려들어와 로이의 얼굴을 덮쳤다. 로이는 깜짝 놀라 황급히 문을 닫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로이는 돌아다니지 말라는 켄트의 말을 떠올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서둘러 걸어가기 시작했다.


“얘! 얘!”


그때, 누군가가 로이를 불렀다. 뒤돌아본 순간, 벌써 한 발자국 뒤로 다가온 어느 노인의 얼굴이 로이의 눈에 큼지막하게 들어왔다. 그가 언제 이 통로로 들어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양쪽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노인은 로이에게 바짝 다가서며 귀속말로 말했다.


“얘야, 이 근처에 좋은 바다가 있단다.”


속삭이는 노인의 입에서 비릿한 물냄새와 녹슨 쇠냄새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로이는 한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노인의 역한 호흡이 섞인 공기를 최대한 들이쉬지 않으려 애쓰며, 막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다요?”


노인은 로이의 찡그린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파도가 야트막하고, 물은 따뜻하고, 모래는 진흙처럼 아주 부드럽단다.”






로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높고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첫째 하늘의 외딴섬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매일같이 절벽 끝자락에 앉아 푸르른 바다의 수평선과 아득한 발아래 펼쳐진 반짝이는 백사장, 그리고 바위를 매섭게 깎아내는 거친 파도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곤 했었다. 그것은 로이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이었다.


고향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 험준한 절벽 아래 해안으로 내려가보지 못했고, 로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로이는 늘 고요하게 바다를 갈망해 왔었다. 새하얀 모래를 맨발로 디디어 서서,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고 싶었다. 만일 청량한 파도 냄새를 정면에서 온전히 느낀다면, 그 파도를 헤치며 뛰어들어가 푸른 물속에 잠겨볼 용기도 생겨나리라...

그가 홀연히 고향을 떠나온 후로는 그러한 소망을 잊고 살아왔지만, 하필이면 이 순간, 첫눈에도 마음에 들지 않은 이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토록 로이가 갈망해 온 “바다”라니…






로이는 다시 조심스럽게 노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바다에 갈 수 있나요?”


노인은 로이의 물음에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이 문을 나가 곧장 걸어가다 보면, 여러 개의 통로를 지나게 될 거야. 그 끝에는 이 마을의 마지막 빨간 벽돌집에서 빠져나가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단다. 그 문 앞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리겠지만 조급해하진 말거라. 시간이란 건 말이야, 우리가 쓰고 싶은 만큼 쓰면 되는 것이지 않니? 아무튼, 그 마지막 문을 열고 나가면 눈이 부실 만큼 하얗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나게 될 게야. 그 정원의 가운데 길로 걸어 나가면 바다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나오지.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결국 너는 좋은 바다에 도착하게 될 게다.”


"그렇군요..."


로이는 노인의 지시를 잊지 않으려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자, 이제 어서 가보렴. 좋은 것은 미루지 않는 법이란다."


노인은 로이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문 쪽으로 살짝 떠밀었다. 그런 식의 노인의 독촉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바다에 대한 로이의 갈망은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면의 경고마저 무시할 만큼 간절한 것이었다. 노인은 그런 로이의 마음을 간파하고서는 말을 덧붙였다.


"망설일 필요가 없다니까. 잘못될 일이 뭐가 있겠니? 자 어서, 어서 가보거라. 아, 그리고 그 램프는 놓고 가는 것이 더 편할 게다."


노인은 마치 더러운 물건을 꺼려하듯이 램프를 힐끗거렸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할 이유가 로이에게 전혀 없었지만, 자기 확신에 찬 노인의 기세에 눌린 로이는 램프를 통로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로이가 문 앞에서 잠시 주저하며 멈춰 설 때까지도 노인은 단 한 발자국도 꼼짝 않고 지키고 서있었다. 그는 집요한 눈빛으로 로이를 바라보며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 기다렸다.


결국 로이는 문을 열고, 그 미지근하고 습한 공기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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